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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東國通鑑) 3

 

갑자년(甲子年; 184)

신라 아달라왕 31·벌휴왕 원년, 고구려 고국천왕 6, 백제 초고왕 19

한나라 영제 중평(中平) 원년

 

3

 

신라왕 아달라(阿達羅)가 훙()하고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탈해왕(脫解王)의 손자 벌휴(伐休)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왕이 풍운(風雲)을 점쳐서 홍수와 가뭄,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고 또 능히 사람들의 간사하고 정직함을 아니, 사람들이 그를 성인(聖人)이라 일컬었다.

 

()나라의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고구려를 치니, 왕이 아우 계수(○)를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므로, 왕이 친히 정예한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좌원(坐原)에서 싸워 그를 패퇴시켰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을축년(乙丑年; 185)

신라 벌휴왕 2, 고구려 고국천왕 7, 백제 초고왕 20

한나라 영제 중평 2

 

2 신라에서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와 일길찬(一吉飡) 구수혜(仇須兮)를 제배하여 좌우 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86)

신라 벌휴왕 3, 고구려 고국천왕 8, 백제 초고왕 21

한나라 영제 중평 3

 

봄 정월 신라왕이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풍속을 살폈다.

 

정묘년(丁卯年; 187)

신라 벌휴왕 4, 고구려 고국천왕 9, 백제 초고왕 22

한나라 영제 중평 4

 

3 신라에서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토목 공사를 일으켜 농시(農時)를 빼앗지 말도록 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88)

신라 벌휴왕 5, 고구려 고국천왕 10, 백제 초고왕 23

한나라 영제 중평 5

 

백제에서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니, 왕이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89)

신라 벌휴왕 6, 고구려 고국천왕 11, 백제 초고왕 24

한나라 영제 중평 6

 

가을 7신라의 구도(仇道)가 백제와 더불어 구양(狗壤)에서 싸워 패퇴시켰는데, 5백여 급()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경오년(庚午年; 190)

신라 벌휴왕 7, 고구려 고국천왕 12, 백제 초고왕 25

한나라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

 

가을 8 백제에서 신라의 서쪽 국경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진격하여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므로, 장군 구도(仇道)가 강한 기병(騎兵) 5백을 거느리고 막으니, 백제의 군사가 거짓 후퇴하매, 구도가 와산(蛙山)까지 추격하였는데, 백제의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패하였다. 왕이 구도가 실책(失策)하였다 하여 낮추어 부곡 성주(缶谷城主)를 삼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삼았다.

 

신미년(辛未年; 191)

신라 벌휴왕 8, 고구려 고국천왕 13, 백제 초고왕 26

한나라 헌제 초평 2

 

여름 4

고구려에서 좌가려(左可慮) 등이 반역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중외 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留)와 평자(評者) 좌가려는 모두 외척(外戚)으로 국병(國柄)을 잡고 의롭지 않은 일을 많이 행하였는데, 그 자제(子弟)는 모두 세력을 믿고서 교만하고 사치하여 남의 자녀(子女)와 전택(田宅)을 약탈하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노하여 주벌(誅罰)하려고 하자, 좌가려 등이 네 연나부(椽那部)와 더불어 모반하다가 이에 이르러 무리를 모아 왕도(王都)를 치니, 왕이 기내(畿內)의 군사를 징발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고구려에서 처사(處士) 을파소(乙巴素)를 초빙하여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왕이 이미 좌가려(左可慮) 등을 복주(伏誅)하고 영()을 내리기를,

근래에 관작(官爵)은 총애로써 제수하고 직위(職位)는 덕이 없어도 승진되어 그 해독이 백성에게 전하고 우리 왕가를 흔들어 놓으니, 이는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소치이다. 너희들 사부(四部)에서는 각각 밑에 있는 현량(賢良)한 자를 천거하라.”

 

하였다. 이에 모두 동도(東都)의 안유(晏留)를 천거하므로, 왕이 그를 불러들여 국정을 맡기니, 안유가 왕에게 말하기를,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우둔하여 진실로 큰 정사(政事)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西鴨綠谷)의 좌물촌(左勿村)에 을파소란 사람이 있는데, 성질이 강직하고 지려(志慮)가 깊으나 세상에 쓰임을 당하지 못하고 농사에 전력하여 스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써 그를 맞이하여 중외 대부(中畏大夫)에 제수하고 관작(官爵)을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외람되게 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없고 재주가 모자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선생은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곤궁하게 초야에 있은 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선뜻 나와 주니, 나의 기쁨만이 아니라 사직(社稷)과 생민(生民)의 복이다. 무엇으로써 과인을 가르쳐 줄 것인가?”

 

하매, 을파소가 대답하기를,

신의 노둔한 재질로는 명령을 감당할 수 없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량(賢良)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제수하여 대업(大業)을 이루게 하소서.”

 

하자, 왕이 을파소가 그 벼슬을 박하게 여기는 것으로 알고 곧 국상에 제수하니, 대신과 종척(宗戚)이 모두 그를 미워하므로, 왕이 말하기를,

진실로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두 멸족(滅族)하겠다.”

하였다. 을파소가 그 지우(知遇)해 줌에 감동하여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니, 인민(人民)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 고구려왕이 안유(晏留)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그대가 아니었으면 내가 을파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 곧 임명하여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옛날 명철한 임금은 어진 사람에 대해 입신(立身)시킴에 있어 방위가 없고 등용함에 있어 의혹이 없었으니,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나라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공명(孔明)에게, ()나라 부견(○)이 왕맹(王猛)에게 한 것과 같이 한 후에야 어진 이가 위()에 있고, 능한 자가 직()에 있게 되어서 정교(政敎)가 아름답게 밝아지고 국가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왕이 결연히 혼자서 판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여 뭇사람의 구설에 흔들리지 않고서 백관의 위에 앉히고 또 그 천거한 자를 상주었으니, 선왕(先王)의 법을 체득(體得)하였다고 이를만하다.” 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94)

신라 벌휴왕 11, 고구려 고국천왕 16, 백제 초고왕 29

한나라 헌제 초평 5

 

겨울 10 고구려에서 진대법(賑貸法)을 세웠다. 이에 앞서 왕이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다가 우는 사람을 보고 그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신은 가난하여 늘 품을 팔아서 어미를 봉양하여 왔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식량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런 극단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그를 위로하였다. 이어 내외의 해당 관청에 명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과 늙고 병들며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를 찾아서 진휼(賑恤)하게 하고, 또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官穀)을 방출하여 백성에게 진대(賑貸)하되,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알맞게 하고, 겨울에는 환수(還輸)하도록 하여 항식(恒式)으로 삼으니, 내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이 나가서 노닐다가 늙은이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니, 노인(老人)이 말하기를, ‘원컨대 온 나라의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내려 주소서.’ 하자, 환공이 말하기를, ‘과인의 창고에 있는 곡식으로 어찌 온 나라의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두루 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어진 마음은 있으나 정사(政事)하는 것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자산(子○, 공손교(公孫僑))이 정()나라의 정승이 되어 그 승여(乘輿)로써 사람을 진유(溱洧)에서 건네 주었는데, 이는 사소한 은혜를 행하는 것이요 정사하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군(人君)이 반드시 개개인에게 곡식을 내려 주고 개개인을 물에서 건네 주려고 한다면 사람과 날수가 또한 부족하여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 도리어 두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고구려왕이 길에서 곤궁한 백성을 보고 그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고, 인하여 온 나라의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는 자들을 생각하여 드디어 진대법을 세웠으니, 그는 이른바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를 안다고 하겠습니다.”

 

병자년(丙子年; 196)

신라 벌휴왕 13·내해왕 원년, 고구려 고국천왕 18, 백제 초고왕 31

한나라 헌제 건안(建安) 원년

 

여름 4

신라의 궁()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또 금성(金城) 동쪽 문에 벼락이 쳤다.

 

신라왕 벌휴(伐休)가 훙()하였다. 대손(大孫) 조분(助賁)은 아직 어리고,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의 아들 내해(奈解)가 약간 크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웠다. 신라에는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4월 이 날에 와서 곧 비가 내리니, 백성이 기뻐하며 경축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97)

신라 내해왕 2, 고구려 고국천왕 19·산상왕 원년, 백제 초고왕 32

한나라 헌제 건안 2

 

여름 5

고구려왕 남무(男武)가 훙()하자, 왕후(王后) 우씨(于氏)가 유명(遺命)을 속여 왕의 아우 연우(延優)를 세웠다. 왕이 훙하자 우씨가 비밀스레 발상(發喪)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인 발기(發○)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왕은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계승해야겠다.”

하니, 발기는 왕이 훙한 것을 모르고 말하기를,

하늘의 역수(曆數)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므로 경솔하게 의논할 것이 아니며 더구나 부인(婦人)이 밤에 나다니는 것이 예()이겠습니까?”

 

하므로, 왕후가 부끄럽게 여기고 문득 연우의 집으로 가니, 연우가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였다. 왕후가 말하기를,

왕이 훙하고 후사가 없으니, 발기가 나이 많으므로 의당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여 무례하게 대하므로, 이 때문에 그대를 보러 온 것입니다.”

 

하였다. 연우가 몸소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잘못 그의 손가락을 다치자,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그의 다친 곳을 싸매 주며 연우에게 이르기를,

밤이 깊어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하며, 드디어 연우의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유명(遺命)을 속여 연우를 왕위에 세우고 왕을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냈다.

 

고구려의 발기(發○)가 요동(遼東)에 군사를 청하여 연우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우씨가 연우를 세우자, 발기가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포위하고 부르짖기를,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차서를 뛰어넘어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큰 죄이다. 마땅히 속히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처자(妻子)까지 죽이리라.”

 

하였는데,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나라 사람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으므로, 발기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서 처자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보고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왕 남무(男武)의 동복 아우입니다. 남무가 죽고 후사가 없었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통하여 대위(大位)를 찬탈하고 천륜(天倫)을 폐()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분개하여 상국(上國)에 내투(來投)하는 것이니, 원컨대 군사를 빌려주어 난을 평정하게 하소서.”

 

하니, 공손도가 그를 따랐다. 이에 고구려를 와서 치매, 연우의 아우 계수(○)가 병사를 거느리고 막으니, ()나라 병사가 크게 패하였다.

발기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늙은 형을 해치려 하느냐?”

하니, 계수가 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형에게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형 또한 한때의 분한 마음으로 종국(宗國)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죽은 뒤에 무슨 면목으로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보려 하십니까?”

 

하자, 발기가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견디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찔러 죽으므로, 계수가 슬피 울며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돌아왔다. 왕이 계수에게 말하기를,

발기가 종국을 치려고 꾀하였으니, 그 보다 큰 죄가 없다. 이제 네가 놓아주고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한 일인데, 도리어 울며 슬퍼하니, 과인(寡人)을 무도(無道)하다고 여기느냐?”

 

하니, 계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은 청컨대 한마디 말을 하고 죽겠습니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다 하더라도 대왕이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간에 우애하는 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이 대왕의 미덕을 이루려고 하였기 때문에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낸 것인데, 이제 도리어 노하십니까? 대왕께서 만약 의친(懿親)을 폐하지 않고 형의 예로써 장사지낸다면, 누가 의롭지 않다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하였으니 청컨대 주벌(誅罰)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자리 앞으로 나와 위로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어질지 못하여 위혹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진실로 지나쳤다. 그대는 책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가을 9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발기의 상여를 봉영(奉迎)하여 왕의 예로써 배령(裴嶺)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고구려왕 연우(延優)가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王后)로 삼았다.

 

[권근이 말하기를,]

배필(配匹)의 관계는 인륜의 근본이요, 왕교(王敎)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혼인의 예가 바른 다음에야 규문(閨門)이 바르고 나라가 다스려지며, 교화(敎化)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질 것이니, 이는 주()나라의 이남(二南)1)이 만세에 법이 되는 까닭이다. 이제 우씨가 왕의 적비(嫡妃)로써 왕이 훙하자 슬퍼하지 않고 비밀스레 발상하지 않았으며, 밤에 왕의 아우 발기에게로 달려가 그를 세워 후사로 삼기를 꾀하였으나 발기가 예로써 사양하고 보냈으니,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여기에서 마음이 변했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참회하지 않고, 또 연우에게로 달려가서 그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유명(遺命)이라 속이고 그를 세웠다. 연우는 이욕에 빠져 그 부끄러움을 잊고 곧 그를 세워 비()로 삼았으니, 그 행위가 돼지보다 심하여 천리(天理)가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끊어졌다. 이렇게 하고도 백성의 위에 있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시경(詩經)용풍(○)의 장자(墻茨상중(桑中순분(○해로(偕老)의 여러 시()는 어찌하여 지었는가 하면 선강(宣姜, ()나라 선공(宣公)의 부인)을 풍자한 것이며, 어찌하여 그를 풍자하였는가 하면 선공(宣公)이 졸()하자, 선강이 그의 서자(庶子)인 완()과 통정(通情)하여 음란하고 더러우며 외설되고 방탕하여 예의가 없어서 인도(人道)가 끊기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더럽게 여겨서 반복하여 비난하고 풍자한 것이 3, 4회에 이르러 마지않았는데, 장자(墻茨)1()에는 안방의 얘기는 말할 수 없다[中○之言不可道也].’ 하였고, 2장에는 자세히 말할 수 없다[不可詳也].’ 하였으며, 3장에는 떠들 수 없다[不可讀].’ 하였으니, 대개 선강이 완과 더불어 음탕하고 방종하여 규문(閨門)을 더럽혔으므로, 이를 사람의 입[牙頰]에도 담을 수 없거든, 더구나 그를 자세히 말하거나 떠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씨의 죄는 선강보다 지나친 것이 다섯이니, 왕이 죽을 때에 일찍이 임종(臨終)하지 않고, 슬퍼하며 통곡하는 기색 없이 곧 음란한 마음을 일으켜 숨기고 발상(發喪)하지 않았으니 첫 번째요, 옛날에 부인(婦人)은 부모(傅姆)가 없으면 밤에 당()에도 내려가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왕후의 존귀한 몸으로 밤을 틈타 혼자 달려가서 스스로 혐의를 멀리하지 않았으니 죄의 두 번째요, 연우와 더불어 술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방자하게 간음(奸淫)하여 천상(天常)을 더럽히고 혼란하게 하였으니 죄의 세 번째요, 발기는 장형(長兄)의 위치로서 의당 왕위에 세웠어야 하는데, 사사로운 애정으로 연우를 세워 신기(神器)를 도둑질하였으니 죄의 네 번째요, 지난날에는 전왕의 후()가 되고, 오늘에는 지금 왕의 후가 되어 한 몸으로 두 번 국모(國母)가 되었으면서도 완악한 음심(淫心)으로 부끄러움이 없으니 죄의 다섯 번째입니다. ()나라 무후(武后)가 일찍이 태종(太宗)을 섬겼고 양귀비(楊貴妃)가 이미 수왕(壽王, 당나라 현종의 아들)의 짝이 되었었는데, 고종(高宗)과 현종(玄宗)이 먼저 취우(聚○)2)의 마음과 신대(新臺)3)의 생각을 일으켰으니, 무씨(武氏)와 양귀비가 비록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가벼운 죄에 처할 뿐입니다. 지금 우씨는 음()으로서 양()보다 앞서고 지어미로 지아비를 업신여겨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히고 음양의 도를 거슬렀으며 천지의 기강을 거슬렀으니, 일찍이 순작(○)만도 못하며, 더구나 이 다섯 가지 죄를 지었으니, 천하 고금에 더러운 행동과 도덕에 위배된 짓을 한 자는 특히 이 한 사람 뿐입니다. 또 어찌 선강과 양귀비·무후의 저지른 일에만 그쳤겠습니까? !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발단입니다. 우씨가 죽을 때에 스스로 실절(失節)한 것을 알고서는 지하(地下)에 가서 국양(國壤, 고국천왕)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하였다면 인심(仁心)과 천리(天理)가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연우가 왕후로 책봉할 때에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한 명이라도 있어 옳지 못함을 강력히 진술하여 저지하였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 조금이나마 대의(大義)를 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애석합니다. 이미 우씨의 죄를 거론하였으니, 연우의 악()은 폄절(貶絶)을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나타날 것입니다.”

 

각주

1) 이남(二南): 시경(詩經)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 주남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수신 제가(修身齊家)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은 남국(南國)의 제후가 후비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

2) 취우(): 금수(禽獸)는 부자나 부부의 분별이 없어 수컷들이 한 마리의 암사슴을 공유(共有)한다는 말로, 인간의 난륜(亂倫)을 비유한 말임.

3) 신대(新臺): 시경(詩經)패풍()의 편명으로, ()나라 선공(宣公)이 그의 아들 급()을 제()나라에 장가들였었는데, 그 여색(女色)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차지하려고 하여 하상(河上)에다 신대(新臺)를 지어 놓고서 맞이하였다는 고사(故事).

 

무인년(戊寅年; 198)

신라 내해왕 3, 고구려 산상왕 2, 백제 초고왕 33

한나라 헌제 건안 3

 

2 고구려에서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기묘년(己卯年; 199)

신라 내해왕 4, 고구려 산상왕 3, 백제 초고왕 34

한나라 헌제 건안 4

 

3 가락국왕(駕洛國王) 수로(首露)가 졸()하니, ()158세이다. 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였다.

 

신사년(辛巳年; 201)

신라 내해왕 6, 고구려 산상왕 5, 백제 초고왕 36

한나라 헌제 건안 6

 

2 가야국(加耶國)에서 신라에 화친을 청하였다.

 

계미년(癸未年; 203)

신라 내해왕 8, 고구려 산상왕 7, 백제 초고왕 38

한나라 헌제 건안 8

 

3 고구려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산천에 기도하였는데, 이달 15일 밤 꿈에 하늘에서 이르기를,

너의 소후(少后)로 하여금 사내아이를 낳게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꿈에서 깨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나에게 말한 것이 이와 같이 순순(諄諄)하였는데,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랴?”

하니, 을파소(乙巴素)가 대답하기를,

천명(天命)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왕께서는 기다리소서.” 하였다.

 

가을 8 고구려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가 졸()하니, 나라 사람들이 통곡하며 슬퍼하였다. 왕이 고우루(高優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은 고구려의 어진 임금으로, 을파소를 초려(草廬) 가운데에서 등용하여 백료(百僚)의 위에 두고는 말한 것을 듣고 계책을 실행하여 그의 생각에는 장차 국가를 함께 다스리어 종사(宗社)의 만세(萬世)의 계획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고국천왕이 훙서(薨逝)하고 시체가 식지도 않았는데, 우씨가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하였으며 연우는 왕위를 훔쳤으므로, 그 죄악은 위로 천지에 통하는 처지여서 사람마다 함께 주토(誅討)하여야 할 자이며, 발기가 이미 우씨에 항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친 것은 진정 의로운 거사였습니다. 을파소가 상상(上相)이 되었으니, 의당 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우씨와 연우를 잡아 고국천왕의 영구(靈柩) 앞에 나아가서 그 죄를 열거하여 사사(賜死)하고 발기를 세웠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 대사(大事)가 정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연우를 도와 발기에 항거하여 그로 하여금 험한 길로 달아나 다른 나라에 우거(寓居)하다가 드디어 운명(殞命)하게 하였으니, 이미 대신으로서 전복(顚覆)될 위기를 부지(扶持)하는 책임을 잃은 것이며, 연우가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고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기에 미쳐서는 천하 고금의 큰 변고인데도, 능히 간하여 멈추게 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그 조정에 있으면서 연우의 녹을 달갑게 먹었으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비루한 사람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한 것은 을파소를 이른 것입니다.”

 

갑신년(甲申年; 204)

신라 내해왕 9, 고구려 산상왕 8, 백제 초고왕 39

한나라 헌제 건안 9

 

가을 7 백제에서 신라의 요거성(腰車城)을 쳐서 빼앗고 그 성주(城主) 설부(薛夫)를 죽이니, 신라왕이 노하여 왕자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육부(六部)의 정예 군사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정해년(丁亥年; 207)

신라 내해왕 12, 고구려 산상왕 11, 백제 초고왕 42

한나라 헌제 건안 12

 

봄 정월 신라에서 이음(利音)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아, 지내외병마사(知內外兵馬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무자년(戊子年; 208)

신라 내해왕 13, 고구려 산상왕 12, 백제 초고왕 43

한나라 헌제 건안 13

 

여름 4 ()가 신라를 침략하므로, 이음(利音)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겨울 11 고구려에서 교사(郊祀)에 쓸 돼지가 달아나므로, 이를 맡은 자가 뒤따라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는데, 날뛰어 잡지 못하자, 어떤 한 여인이 나이는 스무 살쯤 되며 얼굴이 아름답고 곱게 생겨, 웃으면서 앞으로 나와 잡은 뒤에야 쫓아가던 자가 얻게 되었다. 왕이 듣고 이상하게 여겨 미행으로 밤에 그 여인의 집에 이르러 동침하려 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왕의 명령을 감히 피할 수 없으나, 행여 자식을 두게 되면 원컨대 버리지 마소서.”

하므로, 왕이 승낙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구려왕 연우(延優)가 위로 우후(于后)에게 간음하였으니, 일찍이 짐승만도 못했고, 이제 또 (궁중에서) 몸을 빼내어 미행(微行)하여 촌항(村巷)의 소첩(小妾)에게 음란한 짓을 하면서 농락하고 무례하기를 필부(匹夫)의 천박한 행동을 하는 자와 같이 하였으며, 다시 추접하게 절개를 잃은 우씨(于氏)로 하여금 음란과 질투를 방자하게 행하면서도 일찍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없게 하였으니, 심합니다. 연우의 무도함이여! 전일에는 윤리를 어지럽히는 행동으로 규문(閨門)을 더럽혔으며, 오늘에는 음탕한 욕심을 자행하여 여염집에서 음란한 짓을 하였으므로, 강상(綱常)을 끊고 예의를 없애버렸으니, 천년의 뒤에라도 누가 침 뱉고 욕하며 더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심합니다. 연우의 무도함이여!”

 

기축년(己丑年; 209)

신라 내해왕 14, 고구려 산상왕 13, 백제 초고왕 44

한나라 헌제 건안 14

 

가을 7 포상(浦上)의 팔국(八國)이 가라(加羅)를 침략할 모의(謀議)를 하자, 가라의 왕자(王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六部)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여, 팔국의 장군(將軍)을 쳐서 죽이고 포로로 잡혀 있던 6천 인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이 싸움에서 물계자(勿稽子)라는 사람의 공이 가장 컸으나 이음에게 시기를 당하여 녹훈(錄勳)되지 않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공이 큰데도 녹훈되지 않았으니, 원망스럽지 않은가?”

하니,

무슨 원망이 있겠느냐?”

 

고 말하므로,

어째서 왕에게 알리지 않느냐?”

고 하매,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志士)가 하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마땅히 뜻을 가다듬어 때를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가을 9 고구려 왕자 교체(交○)가 출생하였다. 이에 앞서 왕후 우씨(于氏)가 주통촌(酒桶村)의 여인을 질투하여 남이 모르게 병사(兵士)를 보내어 죽이려 하였는데, 여인이 남복(男服)을 하고 도망가므로, 병사가 따라가 해치려 하매, 여인이 말하기를,

나를 죽이라고 왕이 명하였느냐? 지금 첩()은 임신 중이니, 첩을 죽이는 것은 괜찮지만 왕자를 죽여서야 되겠는가?”

 

하니, 병사가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왕후가 더욱 노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는데, 왕이 임신하였다는 것을 듣고 다시 여인의 집에 이르러 힐문하니, 대답하기를,

첩은 평생 동안 형제와도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감히 이성(異姓)의 남자를 가까이하였겠습니까?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는 사실 대왕의 유체(遺體)입니다.”

 

하므로, 왕이 기뻐하여 선물을 몹시 후하게 주었으며, 왕후도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남자를 출생하니,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뒤를 이을 아들을 내려 준 것이다.”

하고, 교사(郊祀)에 쓸 돼지로 인해 얻었다 하여 이름을 교체라 하고, 그 여인을 세워 소후(小后)로 삼았다. 처음에 소후의 어머니가 임신하여 점을 치니, 무당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출생하자 후녀(后女)라고 이름하였다.

 

겨울 10 고구려에서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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