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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己巳年; 249)

신라 첨해왕 3, 고구려 중천왕 2, 백제 고이왕 16

위제 방 가평(嘉平) 원년

 

신라에서 우로(于老)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사량벌국(沙梁伐國, 일명 사벌국(沙伐國)이라 한다.)을 토벌하여 멸하였는데, 그들이 백제에 내응했기 때문이다.

 

여름 4 ()가 신라에 침략하여 우로(于老)를 죽였다. 처음에 왜의 사신 갈야고(葛耶古)가 신라에 내빙(來聘)하였을 때 왕이 우로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었는데, 우로가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의 임금을 염노(鹽奴)로 삼고 왕비를 찬비()로 삼을 것이다.”

하니, 왜주(倭主)가 이를 듣고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어 내침(來侵)하였다. 왕이 유촌(柚村)에 나아가 있었는데, 우로가 말하기를,

오늘의 입구(入寇)는 신이 말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신이 청컨대 이를 담당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왜군(倭軍)에 이르러 말하기를,

전일의 말한 것은 농담일 뿐인데,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에 이를 줄이야 생각했겠느냐?”

하니, 왜인(倭人)이 그를 붙잡아 나무를 쌓아 놓고 불에 태워 죽이고는 떠나갔다. 그 후에 왜의 사신이 내빙하니, 우로의 처()가 왕에게 사사로이 대접하기를 청하여, 그들이 술에 취하자, 사람을 시켜 붙잡아 불태웠는데, 왜가 노하여 금성(金城)을 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어 물러갔다.

 

[권근이 말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우로(于老)가 그 당시 대신(大臣)이 되어 군국(軍國)의 일을 맡고 있으면서,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의 모책(謀策)은 반드시 남보다 지나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마디의 잘못된 말로 두 나라가 서로 싸우고 자신은 죽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추기(樞機)의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의 처()는 원수를 잊지 못하여 반드시 갚으려고 하였으니, 가상히 여길 점이 있겠으나, 그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고 하여 감히 오는 사신을 죽였고, 또 두 나라가 서로 싸우게 하는 데에 이르게 하였는데도, 당시의 임금과 신하가 미연에 금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오직 입은 좋은 일도 낼 수 있고 군사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로가 한마디의 실수로 소추(小醜)와 불화를 만들어 병화(兵禍)를 불러일으켜서 자신을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한 것은 진실로 많이 책망할 것이 못될 것이고, 문득 신라의 임금과 신하가 실수한 것이 또한 많습니다. 왜노(倭奴)가 갑자기 분병(忿兵)을 일으켜 곧바로 국도(國都)로 나왔으니, 이는 바로 문정(門庭)에 닥친 도적인데, 방어하는 데만 이용한 자들이 이에 우로가 단신으로 말을 타고 적()에게 나가겠다는 것을 들어주어 적()으로 하여금 통쾌한 마음으로 불태워 죽이게 하였으며, 우로가 아무리 말을 실수한 죄가 있다고 하나 나라의 훈척 대신(勳戚大臣)은 국가의 경중(輕重)에 관계되는 사람인데, 적의 수중에 맡겨 두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그 실수가 첫 번째입니다. 대신(大臣)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 국가의 큰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고 소혈(巢穴)을 전복시켰어야 거의 우로의 원수를 갚고 전일의 수치를 씻어서 대국(大國)의 위엄을 펼 수 있는 것인데, 당시에 정토(征討)의 거사를 듣지 못하였으니, 그 실수가 두 번째입니다. 만약 혹 형세와 시기를 헤아려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고 군사로 능가하지 못할 것이 있으면, 진실로 마땅히 그 빙문(聘問)하는 것을 끊고 그 오는 사신을 막아서 그와 더불어 서로 우호 관계를 갖지 말았어야 옳을 것인데, 이제 곧 마땅히 토벌해야 할 죄를 놓아두고 오히려 교린(交隣)의 예로써 대우하였으니, 그 실수가 세 번째입니다. ()의 사신이 오자, 우로의 처가 사사로이 대접하여 술에 취한 뒤에 죽인 것을 하늘이 보복한 것으로 삼았으니, 우로의 처에 있어서는 족히 훌륭함이 있다고 하겠으나, 한 부인으로 인하여 그 신사(信使)를 죽인다면 나라의 예()에 있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실수가 네 번째입니다. 하나의 기회를 만나서 이런 네 가지 실수가 있었으니, 장차 어떻게 내치(內治)를 수습하여 외모(外侮)를 막겠습니까? 이로부터 병화(兵禍)가 연결되어 외구(外寇)가 더욱 치성(熾盛)해진 것이, 반드시 오늘의 처치가 마땅함을 잃은 소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미년(辛未年; 251)

신라 첨해왕 5, 고구려 중천왕 4, 백제 고이왕 18

위제 방 가평 3

 

봄 정월 신라왕이 처음으로 남당(南堂)에서 정사를 듣고, 부도(夫道)를 아찬(阿飡)으로 삼아서 물장고(物藏庫)의 사무를 맡겼다. 부도는 한지부(漢祗部) 사람인데, 서산(書算)을 공부하였다.

 

여름 4 고구려왕이 부인(夫人) 관나(貫那)를 죽였다. 처음에 관나는 얼굴빛이 아름답고 머리채가 9()이었으므로, 왕이 그를 사랑하여 장차 세워 소후(小后)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왕후 연씨(椽氏)가 그가 총애를 독차지할까 두려워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이 듣건대 서위(西魏)에서 긴 머리를 구하는데, 천금(千金)으로 산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선왕께서 중국에 예를 다하지 않았다가 병란을 당하여 달아나 거의 종사(宗社)를 잃을 뻔하였으니, 지금 왕께서 한 사람의 사신[行李]을 보내어 장발 미인(長髮美人)을 올리면 저들이 반드시 기뻐하여 받아들이고 다시는 침벌(侵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은 묵묵히 있었다. 관나가 두려워하여 도리어 왕에게 후()를 참소하기를,

후가 항상 첩을 꾸짖기를, ‘농가[田舍]의 계집이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고?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후가 대왕이 나가시기를 기다려 첩에게 해를 가하려고 할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후 왕이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니, 관나가 가죽 자루를 가지고 맞이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후가 여기에 첩을 담아 바다에 던지려 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첩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생각하셔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왕이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서 노하여 관나에게 이르기를,

네가 바다에 들어가기를 요망하느냐?”

하고, 드디어 가죽 자루에 담아서 서해(西海)에 던졌다.

 

계유년(癸酉年; 253)

신라 첨해왕 7, 고구려 중천왕 6, 백제 고이왕 20

위제 방 가평 5

 

가을 9 가락국왕(駕洛國王) 거등(居登)이 졸()하고, 아들 마품(麻品)이 즉위하였다.

 

을해년(乙亥年; 255)

신라 첨해왕 9, 고구려 중천왕 8, 백제 고이왕 22

위제(魏帝) () 정원(正元) 2

 

가을 9 백제에서 신라를 침략하므로, 왕이 일벌찬(一伐飡) 익종(翊宗)을 보내어 괴곡(槐谷) 서쪽에서 맞아 싸웠는데, 익종이 군사가 패하여 죽었다.

 

겨울 고구려왕이 아들 약로(藥盧)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국내(國內)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인년(戊寅年; 258)

신라 첨해왕 12, 고구려 중천왕 11, 백제 고이왕 25

위제 모 감로(甘露) 3

 

말갈(靺鞨)의 장() 나갈(羅渴)이 양마(良馬) 10필을 백제에 바치니, 왕이 사자(使者)를 특별히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기묘년(己卯年; 259)

신라 첨해왕 13, 고구려 중천왕 12, 백제 고이왕 26

위제 모 감로 4

 

겨울 12 고구려왕이 두눌곡(杜訥谷)에서 사냥하였는데, ()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니, 왕이 정예 기병 5천을 뽑아 양맥곡(梁貊谷) 골짜기에서 싸워 패배시키고, 8천여 급()을 참수(斬首)하였다.

 

경진년(庚辰年; 260)

신라 첨해왕 14, 고구려 중천왕 13, 백제 고이왕 27

위나라 원제(元帝) 경원(景元) 원년

 

봄 정월 백제에서 (육좌평(六佐平)) 두어 내신 좌평(內臣佐平)은 선납(宣納)의 일을 관장하고, 내두 좌평(內頭佐平)은 고장(庫藏)의 일을 관장하며, 내법 좌평(內法佐平)은 예의(禮儀)의 일을 관장하고, 위사 좌평(衛士佐平)은 숙위병(宿衛兵)의 일을 관장하며, 조정 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의 일을 관장하고, 병관 좌평(兵官佐平)은 외병마(外兵馬)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달솔(達率은솔(恩率덕솔(德率한솔(내솔(奈率)과 장덕(將德시덕(施德고덕(固德계덕(季德대덕(對德문독(文督무독(武督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克虞)를 두었다. 육좌평(六佐平)은 모두 1()이고, 달솔은 2, 은솔은 3, 덕솔은 4, 한솔은 5, 내솔은 6, 장덕은 7, 시덕은 8, 고덕은 9, 계덕은 10, 대덕은 11, 문독은 12, 무독은 13, 좌군은 14, 진무는 15, 극우는 16품이다.

 

2 백제가 영()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색(紫色)을 입고 은화(銀花)로써 관()을 장식하며, 11품 이상은 비색(緋色)을 입고, 16품 이상은 청색(靑色)을 입게 하였다.

 

여름 신라에 큰비가 내려 산이 무너진 곳이 40여 곳이었다.

 

가을 7 신라에서 성패(, 혜성)가 동방(東方)에 나타나 있다가 25일 만에 사라졌다.

 

신사년(辛巳年; 261)

신라 첨해왕 15, 고구려 중천왕 14, 백제 고이왕 28

위나라 원제 경원 2

 

봄 정월

백제왕이 비로소 자줏빛의 큰 소매가 달린 웃옷[紫大袖袍]과 푸른빛의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금화로 꾸민 오라관[金花飾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素皮帶]에 검은 가죽신[烏革履]을 신고 남당(南堂)에 앉아 정사를 들었다.

 

백제에서 진가(眞可)를 내두 좌평(內頭佐平)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 좌평(內法佐平)으로 삼았으며, 고수(高壽)를 위사 좌평(衛士佐平)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 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으며, 유기(惟己)를 병관 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3 백제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겨울 12 신라왕 첨해(沾解)가 훙()하고, 조분왕(助賁王)의 사위 김미추(金味鄒)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석탈해(昔脫解)가 김알지(金閼智)를 계림(鷄林)에서 얻어 궁중(宮中)에서 길러 뒤에 제배(除拜)하여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다. 조분왕이 그의 딸로써 처()를 삼아 주었는데, 이에 이르러 훙하고 후사(後嗣)가 없자, 나라 사람이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임오년(壬午年; 262)

신라 미추왕 원년, 고구려 중천왕 15, 백제 고이왕 29

위나라 원제 경원 3

 

봄 정월 백제에서 범장(犯贓)을 금하는 법을 세웠다. 무릇 관인(官人)이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贓物)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였다.

 

계미년(癸未年; 263)

신라 미추왕 2, 고구려 중천왕 16, 백제 고이왕 30

위나라 원제 경원 4

 

2 신라왕이 국조묘(國祖廟)에 친히 제사지내고 죄인을 대사(大赦)하였으며, 아버지 구도(仇道)를 추봉(追封)하여 갈문왕(葛文王)으로 삼았다.

 

갑신년(甲申年; 264)

신라 미추왕 3, 고구려 중천왕 17, 백제 고이왕 31

위나라 원제 함희(咸熙) 원년

 

3 신라왕이 황산(黃山)에 거둥하여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하여 스스로 보존할 수 없는 자를 위문하고 진휼하였다.

 

병술년(丙戌年; 266)

신라 미추왕 5, 고구려 중천왕 19, 백제 고이왕 33

()나라 무제(武帝) 태시(泰始) 2

 

가을 8 백제에서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므로, 성주(城主) 직선(直宣)이 장사(壯士) 2백 인을 거느리고 공격하여 패주(敗走)시켰다. 왕이 직선을 일길찬(一吉飡)으로 삼고 사졸(士卒)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무자년(戊子年; 268)

신라 미추왕 7, 고구려 중천왕 21, 백제 고이왕 35

진나라 무제 태시 4

 

신라에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아 왕이 여러 신하를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친히 정형(政刑)의 득실을 묻고, 또 사신 다섯 사람을 보내어 백성의 고통을 순문(巡問)하였다.

 

경인년(庚寅年; 270)

신라 미추왕 9, 고구려 중천왕 23·서천왕 원년, 백제 고이왕 37

진나라 무제 태시 6

 

겨울 10 고구려왕 연불(然弗)이 훙()하고 태자 약로(藥盧)가 즉위하였다. 왕을 중천원(中川原)에 장사지냈다. 약로는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경애(敬愛)하였다.

 

신묘년(辛卯年; 271)

신라 미추왕 10, 고구려 서천왕 2, 백제 고이왕 38

진나라 무제 태시 7

 

봄 정월 고구려에서 우씨(于氏)를 세워 후()로 삼았는데, 서부(西部) 대사자(代使者) ()의 딸이다

 

임진년(壬辰年; 272)

신라 미추왕 11, 고구려 서천왕 3, 백제 고이왕 39

진나라 무제 태시 8

 

2 신라에서 영()을 내려 무릇 농사에 방해가 됨이 있는 것은 일체 없애게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276)

신라 미추왕 15, 고구려 서천왕 7, 백제 고이왕 43

진나라 무제 함녕(咸寧) 2

 

2 신라의 신료(臣僚)가 궁실(宮室)을 다시 지을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의 노고를 중시하여 따르지 않았다.

 

무술년(戊戌年; 278)

신라 미추왕 17, 고구려 서천왕 9, 백제 고이왕 45

진나라 무제 함녕 3

 

겨울 10 백제에서 신라를 공격하고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니, 왕이 파진찬(波珍飡) 정원(正源)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경자년(庚子年; 280)

신라 미추왕 19, 고구려 서천왕 11, 백제 고이왕 47

진나라 무제 태강(太康) 원년

 

겨울 10숙신(肅愼)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변경의 백성을 도륙하고 해침으로 왕이 뭇 신하에게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그릇되이 나라를 이어받아 덕은 능히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도 능히 떨치지 못하여 이렇게 이웃의 적국이 우리의 강토를 어지럽히고 있다. 계략 있는 신하와 용맹스러운 장수를 얻어 적의 요충을 꺾어 놓으려 생각하고 있으니, 그대 여러 신하들은 각자 기모(奇謀)와 이략(異略)이 있어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라.”

하니, 뭇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왕의 아우 달가(達賈)가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어 능히 대장(大將)이 될 만합니다.”

 

하므로, 왕이 이에 달가를 보내어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기계(奇計)를 내어 습격해 쳐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추장(酋長)을 죽였으며, 6백여 가()를 부여(扶餘)의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部落) 6, 7개소를 항복받아 부용(附庸)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봉하여 안국군(安國君)으로 삼고, 내외 병마(內外兵馬)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양맥(梁貊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갑신년(甲辰年; 284)

신라 미추왕 23·유례왕 원년, 고구려 서천왕 15, 백제 고이왕 51

진나라 무제 태강 5

 

겨울 10 신라왕 미추(味鄒)가 훙()하고, 석유례(昔儒禮)가 즉위하였는데, 유례는 조분왕(助賁王)의 맏아들이다.

 

을사년(乙巳年; 285)

신라 유례왕 2, 고구려 서천왕 16, 백제 고이왕 52

진나라 무제 태강 6

 

2 신라에서 이찬(伊飡) 홍권(弘權)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아 기무(機務)를 맡기었다.

 

병오년(丙午年; 286)

신라 유례왕 3, 고구려 서천왕 17, 백제 고이왕 53·책계왕 원년

진나라 무제 태강 7

 

봄 정월 백제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2고구려왕 약로(藥盧)가 그 아우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을 죽였다. 처음에 두 사람이 병을 사칭(詐稱)하고 온탕(溫湯)에 가서 그 당류(黨類)와 더불어 절제 없이 놀면서 패역(悖逆)한 말을 퍼뜨리므로, 왕이 거짓 국상(國相)을 삼겠다.’고 불러들여 역사(力士)를 시켜 잡아죽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형제의 친(), 형체는 다르나 부모의 기()는 같이 받았으므로, 아무리 사소한 분노가 있다 하더라도 의친(懿親)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날마다 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순은 천자가 되자 유비()라는 땅에 봉하여 그를 부귀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은 형제간에 노여움을 품지 않고 원망을 품지도 않으며 친밀히 사랑할 뿐이니,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지극함이다. 고구려왕의 아우 일우와 소발이 병을 사칭하고 온탕으로 갔으니, 이는 왕이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우애의 은혜에서 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안으로 스스로 불안하여 병을 사칭한 것이다. 비록 그 놀며 즐기는 것이 절도가 없고 패역(悖逆)한 말을 퍼뜨리어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아우라는 친분으로도 용납됨을 얻지 못하여 제거될까 두려워하며 의뢰할 데가 없어서 원망하는 말을 하였을 뿐이고 반란(反亂)하고 참역(僭逆)하여 신하답지 못한 형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구려왕이 이에 거짓으로 국상(國相)을 제배한다 유인하여 죽였으니, 어질지 못한 것이 심하다. 그리고 골육(骨肉)의 지친(至親)으로서도 오히려 속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뒤에 비록 좋은 벼슬을 주어 붙들어 둔다 하더라도 사람들 가운데 누가 의심하지 않겠는가? ! 왕도(王道)는 인친(仁親)으로 근본을 삼고 신의(信義)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고구려왕은 이 한 가지 일에 의하여 모든 것이 폐하게 되었으니 비록 좋은 정치를 하려 한들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였다.

 

겨울 11

백제왕 고이()가 훙()하고, 아들 책계(責稽)가 즉위하였다.

 

고구려에서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대방은 우리와 구생(舅甥)의 나라이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고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고구려에 대비하였다.

 

신해년(辛亥年; 291)

신라 유례왕 8, 고구려 서천왕 22, 백제 책계왕 6

진나라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말구(末仇)를 이벌찬(伊伐飡)으로 삼고 항상 정사의 중요한 것을 찾아가 물었다.

 

2 가락국왕(駕洛國王) 마품(麻品)이 졸()하고, 아들 거질미(居叱彌)가 즉위하였다.

 

임자년(壬子年; 292)

신라 유례왕 9, 고구려 서천왕 23·봉상왕 원년, 백제 책계왕 7

진나라 혜제 원강 2

 

고구려왕 약로(藥盧)가 훙()하고, 태자 상부(相夫)가 즉위하였으며, 서천(西川)에다 왕을 장사지냈다.

 

3 고구려왕 상부(相夫)가 그의 숙부(叔父)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죽였다. 상부는 어려서 교만하고 방자하여 시기함이 많았고, 달가는 아버지의 항렬에 있으면서 큰 공업(功業)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의지하고 선망하므로 미워하여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양맥(梁貊)과 숙신(肅愼)의 난에 안국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면할 수 있었겠는가?”

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 조상(弔喪)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권근이 말하기를,]

선을 쌓고 악을 쌓는 데에 따라 재앙과 경사가 각각 유()를 좇아 이르는 것이니, 자손으로서 그 응보(應報)를 받는 것도 조부(祖父)로 말미암아 순치(馴致)되지 않음이 없다. 고구려왕 약로가 일찍이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 두 아우를 죽였으니, 잘못을 쌓은 것이 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훙()하고 시체가 식지도 않았는데, 그의 아들 상부가 바야흐로 상중[]에 있으면서 그의 숙부를 죽였고, 겨우 기년(期年)이 되어 또 그 아우를 죽였으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그 아비는 닭을 도둑질하였는데, 그 아들은 저자에서 사람을 겁탈한 격이니, 상부의 포학하고 패려함은 족히 책망할 것도 못된다. ()에 일컫기를, ‘약로는 총명하고 어질어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경애(敬愛)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어진 마음이 없다고는 이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밖으로는 작은 은혜를 보여서 사람에게 기쁘게 하였으되 안으로는 잔인한 생각을 품어 동기를 해쳤으니, 그 마음가짐이 막야()1)보다 더 참혹하였다. 그러므로 그 남은 재앙이 후대에 미치어 총애하던 아우와 아들이 상부에게 죽고, 상부는 또 창조리(倉助利)에게 죽었는데, 약로 자신은 화를 당하는 데에서 면하였으니, 대체로 또한 요행이었다.” 하였다.

 

각주

1) 막야(): 고대(古代) 명검(名劍)의 이름. 수신기(搜神記), “()나라 사람 간장(干將)과 그 처() 막야()가 초왕(楚王)을 위하여 3년 만에야 웅검(雄劍)과 자검(雌劍) 두 개를 만들어 자검만 가져가 바치니, 초왕이 크게 노하여 죽였음. 뒤에 그의 아들이 숨겨 둔 웅검을 찾아내어 복수하려 하였는데, 초왕이 그 기미를 알고 천금(千金)의 상을 걸어 잡으려 하므로, 도망해 산중으로 들어가 길손을 만나서 전후 사실을 말하고 웅검과 내 머리를 가져다 바치고 복수해 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하면서 자결하니, 길손이 용사(勇士)다움에 감복하여 그 머리를 가지고 가서 기뻐하는 초왕에게 접근하여 죽이고 자신도 죽으매, 머리 셋이 한데 문드러졌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계축년(癸丑年; 293)

신라 유례왕 10, 고구려 봉상왕 2, 백제 책계왕 8

진나라 혜제 원강 3

 

2 신라에서 사도성(沙道城)을 개축(改築)하여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옮겨 채웠다.

 

가을 8 모용외(慕容)가 고구려를 침략하니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피하려고 걸어서 곡림(鵠林)에 이르렀는데,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미치게 되매 왕이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신성재(新城宰)인 북부(北部)의 소형(小兄)인 고노자(高奴子)5백 기병(騎兵)으로 왕을 맞이하고, 모용외의 군사를 만나 분격(奮擊)하여 패배시켰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에게 대형(大兄)의 관작을 더해 주고 곡림을 하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가을 9 고구려왕 상부(相夫)가 그 아우 돌고()를 죽였다. 왕은 돌고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 사사(賜死)한다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은 그가 죄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애석해 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야외로 도망쳐 나갔다.

 

갑인년(甲寅年; 294)

신라 유례왕 11, 고구려 봉상왕 3, 백제 책계왕 9

진나라 혜제 원강 4

 

여름 왜인(倭人)이 신라의 장봉성(長峯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9 고구려 국상(國相) 상루(尙婁)가 졸()하였다. 남부(南部)의 대사자(大使者)인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삼고 대주부(大主簿)의 작위로 올려 주었다.

 

을묘년(乙卯年; 295)

신라 유례왕 12, 고구려 봉상왕 4, 백제 책계왕 10

진나라 혜제 원강 5

 

신라왕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왜인(倭人)이 자주 우리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으니, 나는 백제와 함께 공격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홍권(弘權)이 대답하기를,

우리 군사는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함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게 되면 뜻밖의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서 항상 병탄(倂呑)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아마도 같이 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왕이 옳다.’고 하였다.

 

병진년(丙辰年; 296)

신라 유례왕 13, 고구려 봉상왕 5, 백제 책계왕 11

진나라 혜제 원강 6

 

가을 8 모용외(慕容)가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西川王)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발굴하였는데, 일꾼이 갑자기 죽은 자가 있고, 또한 광내(壙內)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이끌고 물러갔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모용씨(慕容氏)의 병마(兵馬)가 정예롭고 강하여 우리 강토를 자주 침범하니 어찌해야 되겠는가?”

 

하니, 창조리(倉助利)가 대답하기를,

북부(北部)의 대형(大兄)인 고노자(高奴子)가 어질고 용맹스러우니, 대왕께서 만약 침구(侵寇)를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신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新城太守)로 삼으니, 고노자가 정사를 잘하여 위엄과 명성이 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는 와서 침범하지 못하였다.

 

정사년(丁巳年; 297)

신라 유례왕 14, 고구려 봉상왕 6, 백제 책계왕 12

진나라 혜제 원강 7

 

이서고국(伊西古國)이 신라의 금성(金城)을 매우 빨리 공격하였으므로 신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많이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대나무 잎으로 귀고리를 하고서 신라의 군사를 도와 적을 격파시키고는 마침내 그들이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혹은 미추왕릉(味鄒王陵) 앞에 대나무 잎이 수없이 쌓인 것을 보고는 나라 사람들은 선왕(先王)이 이상한 군사로 몰래 도와서 이기게 하였다고 하여, 이로 인해 능호(陵號)를 죽장(竹長)이라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마한(馬韓)은 이미 신()나라 왕망(王莽) 시건국(始建國) 원년(元年; 9)에 백제에 멸망되었는데, 다시 한()나라 연광(延光, 후한(後漢) 안제(安帝)의 연호) 원년(122)에 고구려·예맥(濊貊)과 더불어 요동(遼東)을 침략하였다 하였고, 이서고국(伊西古國)은 이미 한나라 건무(建武,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연호) 18(42)에 신라에 멸망되었는데, 다시 진()나라 원강(元康) 7(297)에 신라 금성(金城)을 공격하였다 하였으니, 어찌하여 모두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났다는 것입니까?”

 

무오년(戊午年; 298)

신라 유례왕 15·기림왕 원년, 고구려 봉상왕 7, 백제 책계왕 13·분서왕 원년

진나라 혜제 원강 8

 

가을

()나라가 맥인(貊人)과 더불어 백제를 침략하므로, 백제왕 책계(責稽)가 막다가 적병(敵兵)에게 살해되니, 맏아들 분서(汾西)가 즉위하였다.

 

고구려왕이 궁실(宮室)을 매우 사치하고 화려하게 증축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곤궁하였는데, 여러 신하가 자주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겨울 10

고구려왕 상부(相夫)가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을 죽이려고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신라왕이 인관(印觀서조(署調) 두 사람에게 작위(爵位)를 내렸다. 인관이 저자에서 솜을 팔았는데 서조가 곡식으로 이를 사서 돌아오는 중에 갑자기 소리개가 나타나 솜을 움켜다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으므로, 인관이 가지고 저자로 돌아와 서조에게 이르기를,

소리개가 당신의 솜을 내 집에 떨어뜨렸기에 이제 당신에게 솜을 돌려주겠소.”

 

하니, 서조가 말하기를,

소리개가 솜을 움켜다 당신에게 준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인데, 내가 어찌 받겠오?”

하였다. 인관이 말하기를,

그러면 당신의 곡식을 되돌려 주겠소.”

 

하니, 서조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과 사고 판 지가 이미 이틀이나 되었으니, 곡식도 이미 당신에게 속한 것이오.”

하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는데,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다가 모두 저자에 버리고 돌아갔는데, 장시관(掌市官)이 이를 아뢰니, 왕이 아울러 작위를 내렸다.

 

겨울 12 신라왕 유례(儒禮)가 훙()하고, 조분왕(助賁王)의 손자 기림(基臨)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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