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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도서] 조광조 평전

신병주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조선유학을 대표하는 5현이 있었으니,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그리고 이황이다. 조광조(14821519)는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당시 평안도 어천의 찰방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조광조는 일일곱 살이었다.

 

아버지는 김굉필이 인근에 귀양을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양희지라는 사람을 통해 김굉필에게 아들을 부탁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김굉필은 그를 가르치면서 기재에 뛰어난 모습을 보고 깊이 신뢰했다고 한다.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조광조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4년이 지났을 때 스물아홉의 나이에 처음으로 진사시에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득세는 출사해서 스승처럼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은 기묘사화(1519)까지 겨우 4년이 채 되지 않았다.

 

민본정치와 성리학의 이념을 세우는 등 개혁을 외치는 조광조와 사림 세력은 중종반정 공신 중 일부의 공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역풍을 맞아 화를 입게 된다.

 

저자 신병주 교수는 조광조가 살아간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사화를 꼽는다.

 

“() 까닭은 조광조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성장했고, 그 자신이 기묘사화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네 번의 사화 중에서도 기묘사화는 사림파의 이상과 개혁정치가 가장 적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으로 인식되는 만큼, 조광조의 삶은 물론이고 조선 역사의 전개에서 있어서도빠질 수 없는 사건이다. 50여 년간 지속되면서 16세기 조선의 역사를 압축하는 키워드인 사화는 조광조 개인의 운명과 그 궤적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 18

 

책은 16세기 초, 보수와 개혁의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 개혁파의 대표적인 리더였던 조광조의 삶과 사상의 궤적을 통해 그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불어 조광조와 함께 한 사람들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조광조가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추적한다.

 

이렇듯 조광조의 삶과 활동, 그에 대한 기억을 통해 조광조가 추진했던 개혁 정치의 전개와 그 실패가 오늘날 우리게 던져주는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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