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 은(=영친왕)과 그의 아들 이 구의 이야기. 허울만 남았지만 평생을 그에 얽매이고 휘둘려 살아야 했던 마지막 황족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1장에서는 이 은과 마사코의 결혼생활을, 2장에서는 첫아이를 잃고 남편을 보필하며 구를 낳아 기르는 과정을 마사코의 시선에서, 3장에서는 구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이 구의 이야기는 전개 방식이 독특하다. 책의 시작은 사실 이 구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된다. 개인적으론 부제에 붙인 '비사(悲事)'가 어울릴법한 시작이라 느꼈다. 그리고 영혼이 된 그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저 그 시공간을 끌어오기만 하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서술하며 감상하는 장면도 있다.
이 은과 마사코는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거나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으나 살아가며 서로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쌓여 애틋한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만의 감정과 다독임으로 평생을 돈독하게 살아가기에 힘겨웠던 건 온전한 황족으로도, 온전한 범인으로서의 삶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 은은 여러 작위와 호칭으로 불려왔다. 영친왕, 영왕, 이왕세자, 이왕, 일본의 백작 등등. 일본에 입맛에 맞게 황태자로 책봉되어 일본으로 끌려갔고, 역사 속 그의 삶은 다소 무기력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 자신과 조국의 처지를 모를 수 없었던 그의 속은 과연 무기력하기만 하였을까?
이 은의 이야기에서는 마사코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던 장면들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국적을 잃었을 시절, 한 나라의 황태자라는 신분으로는 해외에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의 백작 신분으로 길을 떠나 여러모로 이용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은밀하게 수첩에 담아온 것, 그리고 그 이상으로 눈과 마음에 담아온 것이 있었다. 어떤 나라를 돌아볼 때 가장 보고 싶은 것과 알고 있는 배경지식 또한 이 은과 마사코의 입장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지킬 수 없는 것은 조국만이 아니었다. 아카사카 저택은 지켜낼 수 없었던 집이었다. '사라진 집'이었다. '잃어버린 집'이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일을 꿈꾸던 이 은은 있는 집도 지키지 못하는 허약하고 힘없는 평민일 뿐이었다.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집은 허공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 (본문 중 204p)
나라가 해방이 되고 양쪽의 나라에서 모두 황족의 지위를 잃었어도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되진 못했다. 한국으로 귀국도 어려운 일이었고 황족으로의 재산을 몰수당한 후 생활비를 지급받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결국 가족과의 기억을 쌓아온 아카사카의 저택마저 헐값에 팔게 되며, 지키지 못한 것은 고국뿐이 아니었다는 허망함에 슬퍼하는 이 은의 속마음이 아마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아니었을까. 제목의 의미도 떠올릴 수 있는 이 구절을 지난 후 이 은은 꺾여버린 가지처럼 시들어져가는 것 같다.
박정 정부 때에 들어서야 겨우 한국 국적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계획해둔 장애인복지사업을 시작한다. 이 은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 뜻을 이어 마사코가 전면에 나서 사업을 지속해나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이 은의 부인이나 황태자비로 대우받지 못하고 적통에 걸맞지 않은 쪽바리 여자라는 비난 어린 시선도 감내해야 했다. 그들의 아들 이 구 역시 황태손 혹은 왕세자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한 채 책임과 부담은 잔뜩 짊어져야 했다.
국권침탈, 대한제국 선언,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의 서거와 3.1운동, 길었던 식민 지배와 급변했던 세계정세, 그리고 광복과 그 이후로도 결코 평안하지 못했던 조국의 격변기를 고스란히 겪은 이들 중 과연 무난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던 이는 얼마나 될까. 이 은과 그의 가족은 그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우리에게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이름은 그래도 익숙한 편이고, 그 외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그들의 생을 훑어보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소설을 읽는 건 왜일까. 작가는 '역사 소설은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허구'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온다. 역사 속 화려한 영웅적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지만, 소설에서 보여주는 구체적인 장면들과 대사들은 그에 대한 생각과 상상을 한층 더 확장시켜준다. 그들은 역사를 살아낸 실제 인물이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고뇌와 속내를 상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나라가 해방되고 왕조가 끝을 맺은 이후 살아있는 왕족들은 과연 평범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남긴 서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