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반도에 전쟁이 터진 그 해 홍주는 열일곱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비행기에 신기해하며 큰소리로 인사까지 건넸지만, 그 비행기는 홍주의 집이 있는 마을을 공격해 엄마와 동생 동주의 목숨을 앗아갔다. 말로만 듣던 전쟁이란 것을 실제로 목격하고 가족을 잃은 홍주는 '죽기 위해' 여군에 지원하고 소녀 첩보원 래빗이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켈로부대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소녀이자 '독한 년'이 되어 부대의 의심을 받으면서도 몇 번이고 임무수행에 나선다.
소녀 첩보원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맨몸으로 사지에 나서 오로지 머릿속에만 정보를 담고 돌아온다.(정체가 발각될 위험에 처하면 자결한다) 부대에 귀환한 후에도 첩보 과정 중의 변절을 의심받고 심문 과정을 거쳐야만 휴식이 가능했다. 이러한 과정을 수십 번 거쳐가며 홍주는 꾸준히 살아남았다. 홍주가 처음 맞닥뜨린 전쟁의 모습에서 '죽음이 쉬웠다'라고 느낄 만큼 전쟁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켰다. 홍주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첩보활동을 하며, 살아남으며 많은 죽음을 마주하고 그들의 수를 캐비닛에 바를 정자로 기록해두기도 한다.
또 다른 래빗 유경의 이야기도 나온다. 유경은 배우였고 위문공연을 다녀오면 주연을 시켜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부대에 왔다가 래빗이 되었다. 래빗이 된 이후에도 유경은 여전히 배우를 꿈꾼다. 당차고 유쾌한 유경과 조심성 많은 홍주의 만남과 우정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곳에서 평범하지 않은 일을 수행하며 이루어진다. 두 사람의 임무는 무사히 끝이 날지, 전쟁이 끝이 난 후에 수많은 래빗들은 어떻게 될지 마음 졸이며 읽어갔다.
전쟁 중에 의심받지 않고 정보를 캐올 수 있는 소녀 첩보원, 여군과 여성 의용군 등 이 책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혹은 저마다의 이유로 전쟁에 뛰어든 여성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런 존재들은 소녀 첩보원이 활약한 켈로부대의 '래빗'작전을 포함해 기록이 남아있는 실제의 이야기라고 한다. 대부분의 군인이 남성인 건 맞지만, 여군 역시 존재했다. 직접 전쟁터에 나가 총을 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 역시 있었다. 하지만 기록은 미미했고 그 미미한 기록조차 주목하지 않았던 게 우리 사회의 시선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그 이야기들도 점점 더 드러나고 관심을 받는 사회와 시대가 되었고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산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흰토끼는 홍주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준 산신님이었을까, 아니면 래빗으로 활동하게 될 홍주의 미래를 예견한 불운의 증표였을까. 책을 덮고 나니 맨 첫 장면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진행될 이야기를 쉬이 예상할 수 없어 더욱 흥미진진했던, 능수능란한 문체로 이야기에 깊게 몰입하며 있을 수 있었던 소설. 낯설지만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갔던 소재와 존재들을 만날 수 있어 뜻깊었던 소설이다.
※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남긴 서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