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나타내는 문장들을 보고 이 소설 또한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궁금했던 건 민음사에서 나온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의 시선이 궁금해 자주 찾아 읽게 되는 시리즈 중의 하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역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을 읽어야 우리가 처한 현실을, 우리의 미래를 미리 엿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팠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을 말하는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남자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의 여자들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 엄마가 돌보는 여자 환자 젠, 엄마의 딸, 딸과 함께 사는 여자. 작가는 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돌보는 환자의 이름도 이제희 이건만 미국식 이름으로 젠이라 부르고, 딸과 딸의 동성 연인도 서로 그린과 레인이라 불린다. 자기 딸이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지만 그들만의 애칭이므로 그녀가 관여할 수가 없다.
소설에서 엄마는 딸의 여자 친구 레인을 인정할 수가 없다. 공부도 많이 해 대학 강사로 일하는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도 낳고 살았으면 싶다. 딸은 왜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저 레인이 눈에 안보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딸과 그 여자애는 몇 달 분의 집세와 생활비 명목으로 엄마에게 돈을 주었고, 그걸로 2층의 누수 문제를 해결했다. 꼼짝없이 그들을 보아야 했다.
엄마는 요양원의 젠을 보며 딸의 미래를 염려한다. 미국 유학까지 갔던 젠. 한국계 입양아인 한 아이를 오래도록 후원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도 없다. 그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을 뿐. 젠의 모습이 마치 미래의 자신과 딸 모습인 것만 같다. 요양병원 측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기저귀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요양원에 들어온 젠에게 더이상의 돈을 지출하기 싫어 그녀를 갋싼 다른 시설로 보내게 한다. 엄마는 다만 사람을 사람답게 대했으면 했다.
나는 엄마의 염려가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다. 엄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가족이 없으면 어때,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젊은 날의 패기일 수도 있다는 걸. 노년이 되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 가족이 커다란 버팀목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생각에 조금쯤은 동의하는 바다. 젠에게서 떠올리는 딸의 미래, 혹은 자신의 미래. 엄마는 그렇게 안타까워했다.
우리의 미래 이야기 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한 단면들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성소주자라는 이유로 대학 시간 강사에서 쫓겨난 사람들,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취급하는 요양원 관계자들. 우리 사회의 병폐를 바라 보는 느낌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그 사람들을 대한다면 우리 또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다만, 그게 염려스럽다. 다만,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