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 해를 마무리하기엔 8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음에도 감히 말해보건데, 올 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타고난 글쟁이가 카우치 서핑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만났을 때, 문장과 글들은 터져오르는 폭죽이 되어 하늘을 수놓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하는 감탄이 새어나왔다. 그가 사용한 거의 모든 메타포들이 나의 마음과 머릿속을 울렸다. 평범할 수 있는 순간도 한 편의 소설처럼 만드는 재주가 돋보인다.
몸과 마음의 무기력증을 탈피하고자 무작정 떠난 배낭여행길, 한정된 돈으로 가늘더라도 가능한 길게 떠돌고 싶은 그에게 '카우치 서핑'은 금세 여행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헬싱키에서부터 런던까지, 수 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마주한 수 많은 우연들은 그에게 선물과도 같은 추억을 선사했다. 악연을 만나는 일도 피할 순 없었지만, 인연이 된 사람들이 연고가 되어 생채기를 치유했다.
도전, 열정, 꿈, 희망 등으로 점철된 흔한 여행에세이와는 다른 느낌이다. 여행지와 맛집을 부산스럽게 소개해대는 대신, 그는 여행 내내 끊임없이 내면을 성찰하고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경험을 공유한다. 여행의 의미가 비단 아름답고 이국적인 것을 '관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낯섦을 통해 일상을 살아갈 단단함을 얻어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고 있자니, 4년 전 칠레에서 만났던 한 아주머니의 얼굴이 포개어진다.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낯선 터미널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에게 엄마의 눈을 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이곳 저곳 물어가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알려주곤, 버스에서 페리로 환승해야 할 지역에 사는 딸의 전화번호가 적인 쪽지를 쥐어주며 말했다. 도착하면 꼭 내 딸을 찾으라고, 딸의 집에서 잘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자식에게 낯선 이를 맡기던 망설임 없는 친절을 나는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헤어지는 그 순간마저 빵을 사주며 배고픔을 챙겨주던 그녀의 마음은 이름모를 그 도시에서의 기억을 반짝이게 했다.
나를 포함해, 여행지에서 혹은 일상속에서 친절을 마주한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익숙함 속에 잠겨있던 추억들이 수면위로 올라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울린 구절들
멋진 광경 앞에 설 때마다 담배를 한 대 피운다는 여행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그 한번의 호흡을 상상해 보곤 했다. 그 찐득한 행위는 낯선 자극에 일상성을 섞어서 기억하는 의식같았다. 그 의식 후부터 그는 일상 속에서 담배 한 개비와 한 번의 들숨과 날숨으로 자신이 보았던 광경 어디로든 훌쩍 떠날 수 있지 않을까.
P.33-34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와서도, 덜 낯선 것들의 품속에서 망설이는 게 나의 알량한 마음이라니.
P.40
돈이 아닌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는 것. 이 여행은 이렇게 조금씩 무가의 가치를 배워가는 과정이 되어 가고 있다.
P.103
이 순간 'We love you'를 우린 너를 사랑해로 번역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칫거리는 나를 보며, 우리 언어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들이 쉽게 표현되지 못하고 가라앉아야 하는가 생각한다.
P.122
트렘은 내가 오늘 하루 내내 걸어온 길들을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생각한다. 내가 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루를 걸었구나.
P.161
하루가 아직 남아 있음에도 저녁은 끝의 냄새를 머금고 있다. 한껏 당겨지던 하루가 그 저녁의 역사 안에서는 탄성을 잃어, 모두 나른하게 저마다의 묵언을 즐기고 있다.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