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노래방에 관련된 추억 없는 사람 없겠지.
예약 버튼인 줄 알고 취소를 눌러서 노래 부르던 친구에게 욕먹은 기억.
애절한 발라드를 디스코 버전으로 바꿔 다 같이 흥겹게 춤추던 기억.
'그대 안의 블루'에 화음 넣어 부르던 기억.
10분 더, 10분 더 계속되는 서비스 시간에 결국 져버리고 시간 남기고 뛰쳐 나온 기억.
트렌드에 맞지 않게 2절까지 부르던 친구를 어이없어하던 기억.
곧잘 노래를 부르셨으나 이제는 박치가 되어버린 아빠의 노래를 듣고 슬펐던 기억.
도저히 올라가지 않아 두 키 낮춰 부르던 기억.
내가 탬버린인지, 탬버린이 나인지 헷갈리게 물아일체되던 기억.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을 몰래 손바닥으로 훔치던 기억. 그래놓고 더 크게 하하 웃던 기억.
중고등학교 시절, 은광여고 앞 즉석 떡볶이 혹은 압구정 뱃고동에서 낚지 불고기 백반을 먹고 늘 노래방에 가서 그렇게 노래를 불러젖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엔 어김이 없었다. 다들 '노래방 자아'는 별도로 구비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가서 뻔했던 적은 없다. 늘 의외였고, 신선했고, 놀라웠다.
'노래방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격정과 진심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방을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땐 뭐가 그리 모든 게 슬프고, 기뻤는지 돌이켜보니 귀엽기 그지없네.
애정 하는 이슬아 작가가 쓴 <아무튼, 노래>. 그녀의 글은 여전히 거침이 없어 반짝인다.
심보선이 말하길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랬다. 그렇다면 나에게 글이란 한 네다섯 번째로 탁월한 내가 첫 번째로 탁월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애매하게 탁월한 사람은 더 탁월한 사람을 구경하고 감탄하며 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기계의 이름이 바로 ‘가라오케’다. ‘비어 있음.’, ‘가짜’라는 뜻의 가라와 오케스트라를 이어 붙인 합성어다. 즉 가라오케란 가짜 오케스트라 기계를 뜻한다. 직접 연주하기 귀찮았던 이노우에가 세계 최초로 만든 발명품이다.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노우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과 간디가 아시아의 낮을 변화시켰다면 이노우에는 아시아의 밤을 바꿔 놓았다. 이노우에는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아시아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나는 어둡고 습한 방에서 성인가요를 잠자코 흡수했다. 아이는 어쩜 그리도 어른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장 많이 자라는지.
노래방. 그곳은 내게 사랑의 예습장이었다. 그 예습이 훗날 어떻게 실전을 방해할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는 미러볼 조명이 스쳐 가는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초등학생들이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프레디 머큐리는 대답했다. “관객들이 듣고 있고 모든 관심이 내게 쏠리면 틀리려고 해도 틀려지질 않아. 늘 내가 꿈꾸던 사람이 되어 있거든.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어.” 그 대답은 나를 너무 놀라게 한다. 나라면 정확히 반대로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듣고 있고 모든 관심이 내게 쏠리면 안 틀리려고 해도 꼭 틀려버려. 나는 내가 꿈꾸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 그게 너무 두려워.”
노래를 잘하는 게 제일 멋진 일인데 말이다. 내 노래는 정직하지만 재미없고 뻔했으며 어떠한 장악력도 없었다. … 그러므로 노래방은 내가 나라는 사실에 가장 자주 절망했던 장소다.
노래방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격정과 진심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방을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룡이처럼 과묵하고 쑥스러운 자의 진심을 대신 전해주는 세상의 명곡들에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노래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다. 그런 일은 자유를 준다. 즐거울 수 있는 만큼만 매달릴 자유 말이다. 글을 쓸 때는 그런 자유가 따르지 않는다.
복희는 말하곤 했다. 너는 이미 다 자란 채로 태어난 것 같았다고. 모든 걸 알아서 해서 키울 때 품이 별로 들지 않았다고. 그래서인지 복희와 나는 오래전부터 친구였다. 초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두발자전거를 각자 몰고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러 갔었다.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힘에 있어서 음악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장기하는 말했다. 이 노래들 중 하나가 흐르기만 하면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언제고 몇 번이고 과거로 가서 머문다. 머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이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이제는 그 노래로부터 꽤나 멀리 왔단 걸 알아차릴 때도 있다.
나는 벌써 이 순간이 그리워. 우리는 그런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 겪으면서도 아쉽다. 흔치 않아서. 영영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서. 시간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좋은 곳에서만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