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내 심장의 연인이었다.
처음 읽었던 로맨스 소설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 로맨스 소설과 멀어져 살다가 다시 읽게 되었던 그때, 시대물 로맨스만 읽었었다.
현실 배경에 판타지를 가지기에는 애가 둘이나 있는 아줌마에겐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예 낯선, 살아보지 못한, 그 어느 시절이 차라리 판타지를 꿈꾸기에는 더 좋았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왕이 그 왕 같고, 그 공주가 그 공주 같은 딜레마에 빠지고서야 현대물로 눈을 돌렸다.
현대물에서도 메디컬물이라고 일컬어지는 병원 배경의, 의사 주인공인 글과의 가장 첫 조우가 바로 '유리심장'이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메디컬 센터'는 절판이라 구하기 힘든 책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절판 책에 목메어 몇 배의 돈을 들여 책을 사 읽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그 즈음 출간된 책을 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유리 심장'.
내게는 맞춤 옷처럼 즐겁고 유쾌한 독서를 경험하게 해 준 책이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많은 책들 중에서도 가장 납득이 쉽고 거부감이 없었던 책이었고,
메디컬 물에서 만나게 되는 환자와의 이야기도 다른 책과는 좀 다른 느낌과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메디컬 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떤 공식 같은 에피들이 등장하지 않아서 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다.)
오랜 친구이다 보니 그들의 사이드 스토리도 많고, 덕분에 병원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묶여 모든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정말,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스토리의 글이 읽고 싶은 날 다시 꺼내 읽고,
유쾌한 웃음과 따뜻한 다독임이 필요한 날에도 꺼내 읽고,
메디컬 드라마가 방송되기 시작하면 또 생각나 꺼내 읽었다.
이 책이 첫 출간된 지 12년이 지났다고 하니 참 오랜 시간 나의 시간들을 함께 지나왔구나 싶어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효인과 진환처럼, 그렇게 오래된 친구처럼, 나 또한 책과 독자로 오랫동안 함께 다정도 하였다 싶다.
12년이 지난 2019년의 시간 앞에 '유리 심장'은 퇴색되었을까.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 동안 우리들이 알고 있던 사랑의 이름들은 과연 빛이 바랬을까.
그때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이 정말 다를까.
시간 앞에 세상 모든 것이 변하고, 색을 잃고, 희미해져 간다 해도, 단 하나 '사랑'만은 굳건히 늘 한결같기를 바라게 되는 나는 너무 센티멘털한 사람인 걸까.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누구에게도 이해되어 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 아닌가 싶다.
까마득한 그 옛날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지난 시간에도, 그리고 바로 지금도, 우리는 늘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매번 사랑에 넘어지고, 사랑에 휘둘리고, 상처받고, 울고, 무너지면서도 여전히 다시 사랑을 향해 걷고 있으니까 말이다.
'유리심장'의 개정판이 그래서 나는 반갑다.
12년 전의 책을 꺼내 지금 읽어도 사실 전혀 올드함을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 앞에 변화한 배경들이 조금씩 고쳐지고 다듬어져 오늘의 독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지.
'유리심장'을 알았던 이들에게는 오래전의 추억으로, 로맨스에 입문한지 오래지 않는 독자에게는 새로운 책의 설렘으로 이 책이 다시 읽히기를 기대해 본다.
내가 그렇게 다시 읽으며 즐겁고 행복했던 것처럼.
'유리심장'은 내 심장의 연인이었던가?!

"나는 너를 ... 공기해"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할 만큼, 너무 당연하고 너무 가까워서 공기같이 서로를 느꼈던 두 사람.
심효인과 장진환은 아주 오래된 친구였다.
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과 한국에서 떨어져 공부했지만, 물리적 거리도 그들의 우정을 갈라 놓지는 못했다.
사춘기를 함께 보내고, 서로의 웃음과 눈물의 이유가 되고,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 같았던 둘.
너무 가까워서, 너무 당연해서, 서로를 사랑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둘은 서른넷이라는 어른의 나이가 되어서야 낯섦을 느낀다.
분명 내가 그토록 신뢰하던 그 친구가 맞는데, 어쩐지 자꾸만 낯설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로, 혹은 여자로 서로를 인식해버리고 마는 상황들이 하나둘 늘어나게 되고, 당혹과 혼란 속에서 우정은 길을 잃고야 만다.
공간과 시간은 그들의 우정 앞에 힘이 없었다고 굳게 믿었지만, 결국 그들이 완벽하게 공유하지 못했던 시간 동안 둘은 서로가 몰랐던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우정이 끝 간 데 없이 깊고 깊어져 더 이상 우정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무섭도록 깊어지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사랑은 그저 사랑이었지만 그것이 사랑인 줄 몰라 우정이라 착각하고 살아왔던 걸까.
?
효인과 진환은 그 오랜 시간을 걷고 걸어 이제서야 사랑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말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우정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감춰질 수 없는,
그보다 더 깊고 짙은,
혹은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지만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공기.
그들이 나눴던 감정은 '공기' 그 자체였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공기했다.


사실 너무 깊은 감정을 담은 책이지만, 책 자체는 참 유쾌하고 따뜻한 책이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도 때로는 유쾌 발랄하고, 때로는 눈물이 핑 돌고, 어느 순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마냥 진지진지한 책이 아니기에 가독성도 좋고,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는 유머가 지뢰처럼 여기저기 깔려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특히나 나는 코믹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유난하게도 조례진 작가님의 유머 코드가 찰떡처럼 내게 와 쫙쫙 붙는다.
정말 빵빵 터지면서 읽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작가님 중 하나이다.
(유머 코드야 다들 개취가 존재할 테지만.ㅎㅎ)
특히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하나 꼽자면 에필로그쯤 들어있는 출산 장면.
어쩌면 그렇게 효인이 같은지.
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효인의 매력은 듬뿍 느껴지지만, 출산 장면은 특히나 효인의 출구 없는 매력을 보여주는 명장면 중 하나라고 꼽고 싶다.
반면 주위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는데(오피스텔 장면이나 출산 장면에서도), 씁쓸한 웃음이 튀어나오고는 했다.
여자에 대한 편견, 여자 의사에 대한 편견, 그런 시선들에 고개 숙이지 않는 효인이 참 멋졌다.
어쩌다 보니 내가 자꾸 효인만을 칭찬하는데,
진짜, 정말, 나의 이상형은 완벽하게 진환이라는 점.ㅋㅋㅋㅋ
난 말 없는 과묵한 남자를 좋아한다.
게다가 남에겐 무뚝뚝하고 나에겐 한없이 다정한, 속정 깊은 남자를 가장 좋아한다.
심지어 진환이는 잘생긴 대다 키도 크고, 똑똑한 데다 능력이 넘쳐흐르는 의사선생님이라규.
진환의 매력 따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누구라도 다 빠져들 테니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참 다르지만, 어쩐지 참 똑같아 보이는 효인과 진환.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전혀 질투가 나지 않았다.
그저 예쁘고, 기특하고, 감사했다.
세상에 이렇게 곧고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야지.
사랑이 광기와 질투와 애증의 뒤범벅이라는 서글픔을 잊게 해주는 둘의 나무 같고 공기 같은 사랑이 나는 참 좋다.
데이트 폭력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처참한 현실에 답답해질 때, 공기처럼 물처럼 햇볕처럼 사랑하는 진환과 효인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본다.
사랑을 잘못 배운 사람들이 바른 사랑을, 진짜 사랑을, 사랑의 올바름을 향해 걷기를 기도하면서.
더 예뻐진 새 옷을 입고 다시 우리 곁에 온 '유리 심장'.
좀 더 많은 쓰담쓰담을 받게 되기를.^^
반갑다, 진환아, 효인아.
너희들이 여전해서, 나도 여전하고 싶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너희들을 보면서, 나도 오랜 시간 다정히 내 사랑을 지키고 싶어진다.
우리는 가슴에 유리심장을 품고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