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옥집에서의 리틀 포레스트라니 이 어찌 부럽지 않겠나.
외식, 배달식을 끊고 집에서 해먹기로 한지 꽤 오래되었다. 한정된 한 달 식비를 가지고 하루 두끼 먹을 것을 챙기는 것도 수월한 일은 아니다. 3일에 한 번 정도 동네에서 좀 걸어야 되는 거리의 00마트에 가본다.
요즘엔 봄나물이 지천이다. 코로나 전만 해도 나물은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와도 손도 대지 않았다. 의심이 많아서인지 어째 재활용한 것처럼 시들시들하고 윤기도 없어 보이고 일단 푸르죽죽한 것이 입에 넣어도 식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온갖 정체 불명의 잡고기와 각종 첨가제가 뒤범벅된 햄 소세지, 냉동식품을 멀리하자 오히려 이런 나물에 눈이 갔다. 할머니, 어머니 세대나 되어야 먹던데 나 역시 그 정도의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기분은 결국 내 손으로 나물을 삶고 무쳐 입으로 가져간 뒤, 식당에서 먹던 그런 맛과는 다르구나 하는 걸 느낀 뒤의 희열이었다.
어릴적엔 거들떠도 안보던 식자재들이 이상스럽게 눈길이 가고 입이 당겼다. 예를 들어 파, 마늘, 호박, 가지, 고추, 버섯, 뿌리채소와 각종 나물등등, 이젠 이런 걸 먹어야 건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도 작용한 듯 싶었다. 대신 안먹기 시작한 것들도 늘었다. 특히 포장재가 화려한 것들과 그래서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것들.
다녀온 마트는 좀 특이한 곳이다. 제철 채소들이 수시로 들어오고 가공식품은 별로 싸지도 않고 종류도 많지 않았다. 또 채소들은 내가 원하는 만큼만 집어 무게를 달아 파는 방식이라 생소한 나물도 한 웅큼만 사다 먹어보고 맛없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크게 리스크가 없다. 이런 건 아마 재래시장에서도 하지 않는 방식일 거다. 신선한 산나물 890원어치가 가능한 일인가
그런 이유로 시간 여유가 있고 유난히 골고루 반찬을 챙겨먹고 싶은 날엔 반찬 가짓수가 대폭 늘어나는 재미가 있다. 누군가를 불러 같이 식사를 하면 금상첨화고, 오늘 먹은 게 내가 된다는 말을 들은 뒤엔 먹고 속 편한 음식을 절로 찾게된다.
얼마 전에 본 책 <여보 나 제주에서 한달만 살다올께>의 저자 편성준 작가의 아내가 쓴 이 책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10월1일부터 22년 9월 30일까지 1년 간의 먹고 산 일기다. 일기나 가계부, 연간 다이어리를 써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하루하루 매일같이 뭔가를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그리고 누구와 먹었는지를 적어 놓은 것들이 이렇게 책 한권으로 나왔을때의 즐거움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육고기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섭취하는 제한적 채식지향자라고 할 수 있다. 고기를 안먹으면 뭘 먹어?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책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 주변에 왜 이렇게 먹을 게 많지? 그리고 맛있어 보여 라고 하며 따라서 만들어 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 안엔 나도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음식을 단지 에너지 보충 차원에서 먹으려고 만들지는 않았다. 남편을 비롯해 같은 집에 사는 여성, 그리고 저자가 잘 알고 있는 이름 알려진 예술인들을 비롯한 지인들을 수시로 불러 같이 식구로 만들어 버렸다. 또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먹을 거리를 만드는데 부지런했다. 남의 재주를 빌리는데도 소홀함이 없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었다. 음식은 저자에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무기가 되었다.
이 책은 계절을 따라간다. 가을에서 시작해 겨울, 봄, 여름을 지나 다시 가을이 오고 가는 사이 제철 재료들로 먹을 것들을 만들고 나누고 저장했다. 특히나 김장을 하고 장을 만드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맛있는 된장과 간장이면 화학 조미료 따위는 끼여들 틈도 없을 것이다. 맛은 당연한 것이고.
마당이라는 공간이 어쩌면 다양한 먹을 거리를 생산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생각해보니 저자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준 사람들이 있어 더욱 맛깔난 음식들이 등장했을 것으로 믿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궁벽한 곳에서 혼자 뭔가를 해먹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 책엔 많은 사람이 나눠 먹기 위해 애를 쓰는 장면들이 섞여있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그또한 재미있을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다.
봄날이 완연하다. 마트에서 사온 나물과 된장찌개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한옥집은 아니지만 베란다 문이라도 열고 새로운 봄바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