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유명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는 1831년에서 1901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이 세계 속의 영국으로 더 넓은 식민지를 가졌던 때다. 당시의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하고 부유한 이면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숱한 희생이 따랐다. 이 때는 급작스러운 변화로 인한 비위생적인 환경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고아들이 늘어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기를 앨리스를 통해서 넌지시 문제점을 표현해 내고 있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수학과 논리학을 가르친 루이스 캐럴이다. 그는 성직자의 생활도 했으나 목사가 되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에 수학에 능력을 보였다. 이 책이 보여주는 기이한 논리적인 세계가 이상할 정도로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저자는 대학에 근무하던 시절 학장 리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그 집이 세 자매와 친근하게 지냈다. 이 글은 그 아이들과 소풍을 가면서 창작해 들려주었던 얘기라 한다. 그것을 언어로 옮겼고 주인공 앨리스는 저자가 특히 귀여워한 둘째아이인 앨리스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기이한 얘기에 잘 심취한다. 그리고 상상의 날개를 편다. 동화의 세계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도 어릴 적 할머니를 통해서 옛날 얘기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그 얘기들이 아마 성장한 그 아이들의 심리적 영역을 결정짓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이야기도 저자가 세 자매들을 재미와 호기심으로 이끌어, 소풍을 가던 길을 즐겁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얘기가 정리되어 이렇게 시대의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되고 있다.
앨리스는 언니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지겹다, 그러다 흰토끼가 달려가고 있는 것을 목도한다. 이때부터 잠에 빠진 모양이다. 앨리스는 흰토끼를 따라간다. 토끼가 토끼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토끼굴로 뛰어든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만 까마득한 수직 통로로 떨어진다. 그러면서 별 생각을 다한다. 이러다 지구를 관통하는 것은 아닐까? 관통하면 어디에 닿을까“ 영국의 상대 쪽은 뉴질랜드일까? 아니 오스트레일리아가 될까? 그러면서 자신이 늘 함께했던 고양이 다이너도 떠올린다. 그 떨어지는 순간에도 많은 생각들이 그의 뇌리에 명멸한다. 다 떨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다시 흰토끼를 발견한다. 그리고 토끼를 따라 집의 복도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황금열쇠를 발견한다. 그것은 정원으로 통하는 작은 문의 열쇠라 생각한다. 앨리스는 정원으로 가고 싶다.
앨리스는 기이한 일을 겪는다. 작은 병에서 -나를 마셔요, 유리상자에서-나를 먹어요 등의 글귀를 읽는다. 그리고 그 글귀대로 행동을 한다. 그러자 앨리스의 몸이 변한다. 너무 자라기도 하고, 너무 줄어들기도 한다. 자신이 너무 커졌을 때 흘린 눈물이 연못이 되어, 자신이 적어졌을 때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눈물웅덩이 많은 짐승들이 빠져 있다. 앨리스는 그 중 생쥐에게 빠져 나갈 방법을 묻기도 한다. 결국 그들은 눈물웅덩이 기슭에 모여 자신들을 말리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건조되기까지 기다린다. 이야기는 영국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용해 변형시킨다. 정복왕 월리엄 이야기, 코커스 경주 등이 소재가 된다. 당대 가장 많이 주목받던 이야깃거리를 보여준다고 여길 수 있겠다. 그리고 앨리스는 자신이 가진 사탕을 동물들에게 준다. 하지만 일행들 중 일부는 먹을 줄 모르는 우스운 상황이 전개된다. 황당한 이야기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이 아이들에겐 흥미로운 상상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앨리스는 마법의 유리병에 든 것을 마시며 몸이 커진다. 돌멩이 케이크를 먹으면서 몸이 작아진다. 그러면서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서 애벌레와의 대화를 나눈다. 애벌레를 통해 시를 유희적으로 사용하고, 자신의 처지를 다시 각성하면서 두려움과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앨리스는 빨리 자신의 몸이 정상이 되어 정원에 들어가고 싶다. 몸이 커지고 작아지게 하는 도구로 버섯이 등장한다. 버섯의 오른쪽, 왼쪽을 먹으면서 키 조절이 가능해 진다. 그리고 몸을 적당히 조절이 가능해 진다. 그러면서 정원으로 들어갈 방법을 구한다.
그때 앨리스 앞에 공터가 나타나고 집이 하나 서 있다. 앨리스는 일단 거기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그곳엔 공작부인이 기거하고 있다. 앨리스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쓴다, 시종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시종과 앨리스의 말이 서로 겉돌고 있다. 그리고 결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진취적인 앨리스의 성정을 만나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안에서는 누가 수프를 만들고 있다. 수프에 후추들 너무 넣었는지 재치기로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그곳에서 몸이 사라졌다가 재생하는 투명인간과 같은 체셔 고양이를 만난다. 또한 요리사에게 혹독하게 대하는 공작부인의 동작에 앨리스는 두려움을 느낀다. 공작부인은 애기를 앨리스에게 맡기고 애기는 돼지로 변한다. 어른이 아이에게 행하는 언행을 은유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앨리스는 어른의 언행을 수용할 수 없어 그곳을 나서다가 체셔 고양이를 만나 나가는 길을 안내 받는다.
얘기를 따라가기가 만만찮다. 상상력을 동원해야 이야기를 마음에 담을 수 있을 듯하다. 허황된 이야기, 맥락도 없는 이야기를 수시로 등장하는 동물들과 연계해 읽어 낸다는 것은 인내심이 요구된다. 체셔 고양이는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다 이곳의 모두는 미쳤다’라는 말을 하면서 모자장수와 삼월토끼 그리고 가장 무기력한 잠꾸러기 쥐가 있는 곳을 소개해 준다. 앨리스는 그곳으로 간다. 그곳은 다과회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지 않고 있다. 오후 6시로 고정되어 있다. 오후 6시에 버터 바른 빵을 먹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대, 그들의 신분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의 삶을 느껴볼 수도 있겠다. 그들의 삶이 엉망진창인 것을 드러냄으로 사회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고 봐도 무난할 듯하다.
이 책의 곳곳에서 대화가 언어유희적인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조롱하거나 은근히 비난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시대가 낳은 비정상적인 것을 언어유희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는 자면서 먹는다. 나는 먹으면서 잔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좋아한다. 나는 내가 좋은 것을 가진다.” 등을 같은 내용으로 여긴다. 그것의 진위 여부를 따진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질서를 보여준다. 혼란스럽고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그곳에서 시간하고 다툰다. 노래를 부르고, 맥락 없는 노래가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혹독한 말도 한다. 시간이 말을 듣지 않음을 멈춘 다과회를 통해서 보여준다. 암담한 시대적 상황을 어울러 생각해 봐도 되겠다.
앨리스는 그곳을 벗어나 버섯을 사용해 키 조절을 해서 정원으로 들어간다. 정원에서는 하트의 왕과 왕비가 등장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론 트럼프 카드다. 왕비는 크로케 경기를 개최하고 학을 경기 도구로, 고슴도치를 공으로, 병정을 골문으로 사용한다. 경기는 왕비의 놀라운 화법 때문에 소란과 무질서가 극치를 이룬다. 경기에 임하는 자들이 조금만 이상하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왕비 때문에 두려움이 도처에 깔려있다. 그리고 크로케 경기는 유야무야 된다. ‘저놈의 목을 쳐라.’ 소리만 곳곳에 들리고 골문은 사형을 시키기 위해 모두 자리를 이탈한다. 하지만 사형을 당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누구든 차가운 얼음을 먹으면 냉정해지고, 붉은 홍차를 마시면 얼굴을 붉히게 돼. 보드라운 케이크를 먹으면 마음씨가 고와지지. 어른들이 이걸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케이크를 아낌없이 나눠줄 텐데.p157 앨리스를 통해 보여주는 고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들이 어른들에게 살아 있다면 보다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저자가 바라는 세상이 이런 앨리스의 말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앨리스는 크로케 경기에 참가 차 온 공작부인과 대화를 나눈다. 공작부인은 시시때때로 앨리스를 어리다고 깔본다. 그리고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른들의 사고방식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공작부인의 모든 말에 교훈이란 말을 붙인다. 이 화법 ‘교훈은?’은 무척 교훈적이지 않다. 앨리스는 마지못해 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다 왕비가 공작부인을 데려 가고 앨리스는 그리폰을 따라가 가짜 거북이를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의 얘기를 한다. 이 글 속에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 많다. 앨리스의 학교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 가짜 거북이의 진짜 거북이 이야기, 바닷가재 사교댄스 이야기 등이 그렇다. 모두가 앨리스의 모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일부로 여겨진다.
또 왕의 주재 하에 재판이 이루어진다. 흰토끼가 이끌어나가는 하트의 잭에 대한 재판이다. 여기에 앨리스가 증인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평결과 형량에 대한 의견이 왕비와 앨리스가 엇갈리고 여왕은 앨리스를 가리키며 ‘저 놈의 목을 쳐라’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때 앨리스는 거대하게 몸이 자라, 위압갑을 주는 존재가 되어 있다. 주위에 여왕의 말을 듣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 앨리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들은 그냥 트럼프일 뿐이잖아요.” 그때 카드가 위로 솟구치더니 앨리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무섭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카드를 쳐내려고 노력하다가 잠에서 깬다. 환몽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다. 잠을 깨니 앨리스는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다. 앨리스는 자신이 겪은 꿈속의 이야기를 언니에게 전한다. 앨리스를 밥 먹으러 가라고 하고, 언니가 다시 한 번 앨리스가 꾼 꿈을 꾼다.
이 소설이 지어지던 시기는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던 때다. 세계의 가장 강한 나라인 영국, 그 영국이 지배해 나가던 나라를 다음에 이끌어갈 자들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그런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항상 예의바르도록 가르침 받았고, 얘기들도 교훈적인 우화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글도 기존의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교훈을 운운하고 있다. 특히 공작부인으로 대표되는 어른들은 말마다 교훈을 입에 달고 있다. 즉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정해진 아이들로 자라도록 가르침 받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앨리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다른 인물들이 구박하고 무시해도 움츠러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또 궁금한 점이 있으면 계속 묻는다. 이런 점이 앨리스를 통해서 저자가 원했던 아이들의 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특히 동화의 주인공들이 거의 남자들인데 반하여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교훈을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면서 성장하는 아이를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소설이고, 명작의 대열에 올려 진 작품으로 인구에 회자된 작품이다. 아마 지금의 어린이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성장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개성이 넘치고 궁금증이 많으며 발랄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 이 책을 보면서 느끼는 우리들의 마음이리라. 오늘날에도 앨리스 같은 성정을 가진 아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책을 읽으면서 남가일몽, 구운몽 등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꿈과 인생, 이 책에서 보여주는 문학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