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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도서]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2006년에서 2009년까지 발표된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책과 같은 평론집은 글이 나온 시기를 기억하면서 읽는 게 좋다. 적어도 시간 상의 착오로 오해를 하지 않게 되니까.  

 

모두 6부로 이루어져 있다. 비평가로서의 작가가 다른 작가들을 크게 시인과 소설가로 나누어 편집해 놓은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문학의 전문가들은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작품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비평가의 설명을 얼마만큼 받아들일 것인가는 독자로서의 개인적인 선택이고 영역이므로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길 것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작가의 글은 근사한 맛이 있다. 앞서 읽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마음에 들어 이 책을 빌려 본 건데 만족스럽다. 이 책이 나올 당시에 읽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내 마음이 궁금하기는 한데 지금 이렇게 괜찮게 여겨지는 걸로 봐서 그때 읽었더라도 만족했을 것 같다. 글의 세계에서 10년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미 읽은 책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작가에 대해 써 놓은 글을 읽을 때는 당연히 반가웠다. 내가 놓쳤거나 무시했거나 부정했던 사항들을 멋지게 되살려 놓은 표현들 앞에서는 감탄했다. 그래, 이게 전문가지. 나는 왜 이만큼 읽어 낼 수 없나 하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하고, 또 이 작가처럼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있는데 없는 능력 때문에 한탄하면서 스스로를 들볶을 필요는 없다는 것까지 알게 된 나이가 되기도 했고.

 

제일 좋은 건 비평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작가의 이름을 얻을 때다. 내가 이미 좋아하고 있는 작가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서 이 비평가가 내가 같은 작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확인하면 뿌듯하기는 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즐거움의 영역이 넓어진 것은 아니니까. 내가 몰랐거나 제대로 못 읽어서 못 누린 작품과 작가를 소개받게 되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으면, 나는 비평가에게도 빠지고 만다. 지금처럼. 그리고 김경주 시인을 더 얻었다. 

 

3부에 모아 놓은 짧은 글들도 산뜻하게 읽었다.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이다. 다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한숨이 난다. 우리는 좀처럼 변하지 못하고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얼마나 더 읽어야 스스로를 안아 줄 수 있게 될까?

 

 

9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404-405

비평은 무엇을 보는가

-문학 작품의 세 가지 가치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물론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첫째는 인식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한다. 무언가는 과학 철학 종교 등이 제공하는 인식적 가치와 함께 갈 수도 있고 그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지만,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들과 무관한 곳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경우 그 인식적 가치는 과학 철학 종교의 언어들로 잘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에서 인식적 가치는 그 작품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때 작품은 내용물을 꺼내려 하면 부서지고 마는 도자기와 같다.

 

둘째는 정서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한다. 기쁨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쁨을, 슬픔이 필요한 사람에게 슬픔을 제공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작품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기쁨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기쁘게 해서 낯선 정서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익숙한 정서를 작품에서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제공하는 낯선 정서에 서서히 젖어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떤 정서는 특정한 작품 안에서만 느낄 수 있다. 작품은 정서의 창조다.

 

셋째는 미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아름답다. 문학의 경우 그 아름다움은 대개 모국어의 조탁과 선용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이고 내용과 형식의 긴밀한 조화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작품은 흔히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것을 전복하는 추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하고 심드렁한 방식으로 미추를 해체하여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다.

 

독자가 이 가치들을 전달받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이 먼저 찾아오기 때문에 독자가 마중을 나가기만 하면 될 때도 있고, 그것을 만나기 위해 독자가 낯선 길을 더듬어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게 눈에 보여서 편안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할 때도 있겠고, 너무 희미해서 과연 그것이 있기는 한가 수상쩍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대개 전자를 고전적이라 하고 후자를 실험적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의 고전은 어제의 실험이었고 오늘의 실험은 내일의 고전이 될 수 있다.

느낌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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