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공부라는 게 잔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게 아닌데 번번이 스스로를 속였다가 미묘한 낭패감을 맛본다. 시간이 흐른다고 나이를 먹는다고 근본 습성 하나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지금 영어 공부를 해서 뭘 이루겠다는 건 아니고, 소박하지만 거창하게 갖고 있는 꿈이 영어로 된 소설을 읽어 보는 일인데, 그러자면 영어 단어를 좀 많이 알고 있으면 읽어 넘기기에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산 책인데, 어원을 밝혀서 단어를 빠르게 많이 익히게 해 준다고 하기에 덜렁 선택한 책인데, 글자만 보면 지루하니까 그림으로 이해를 돕겠다는 편집 의도에도 유혹당한 건데, 결론적으로 단어를 빠르고 쉽게 익히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찌하든 결국은 외워야 하는 것이니 한번 스윽 본다고 저절로 외워지는 그런 천재성은 내게 없던 것이다.
대신 들여다보는 재미는 얻었다. 외워지면 외워지는 것이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넘겨 보다 보니 쏠쏠한 재미가 있다. 오래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쩌고 하는 책도 생각났다. 이미 영어 단어를 많이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또는 영어 단어를 잘 익히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생기기는 하겠다. 얼마나 답답해 보이고 안타깝겠는가 말이다.
급하게 외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림도 구경하고 예문도 보면서 뒤적거리다 보니 괜찮다. 나야 어차피 급한 게 없는 처지니 이렇게 슬슬 보고 말란다. 자기 전에 잠이 올 때까지 단어 그림이나 보는 거지. 어떻게 이런 상상으로 그렸을까 신기해 하면서. 이래서야 영어 소설을 읽게 되는 날이 오기는 멀었겠다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