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은 우연인가 숙명인가. 어느 한쪽의 일방된 입장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마다 조금 더 치우치는 쪽은 있을 것이다. 나는? 글쎄, 숙명 쪽을 덜 믿는 것 같은데. 이런 나에게 소설은 숙명으로 이어진 틀 안에서 인물들의 사정을 열어 보인다.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누구와 누가? 그리하여 숙명의 관계도를 파악하기 위한 읽기가 된다.
몇 년 전 이 작가의 글을 줄기차게 찾아 읽다가 어느 즈음 그만두었다. 읽는 동안에는 계속 재미를 느꼈지만 읽고 나면 이쯤 읽었으니 되었다 싶은 때가 왔던 셈이다. 그러다 이 책을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하고는 모처럼 읽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빌렸다. 그리고 빌려 읽기에 딱 좋았다는 느낌으로 정리한다.
빠른 전개, 독자에게 드러내는 바와 숨기는 바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솜씨, 보이지 않는 것들을 두고 상상과 추리를 하도록 이끌어 들이는 글힘, 세밀하지는 않으나 부족함을 못 느낄 정도로 그려 놓은 인물 묘사는 여전했다. 이러니 책을 잡으면 한번에 다 읽게 된다. 다 읽고 나면 뿌듯한 자부심 따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좀 섭섭하기는 해도.
일본에서는 1993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요즘의 시대상과 거리가 느껴지는 풍경들이 곳곳에 보인다. 작가는 그때도 소설 구성을 이렇게 했나 보다. 일본 내 사회나 역사의 문제(여기서는 인체 실험 같은 경우)를 줄기 하나로 삼고,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물을 설정하고, 여기에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평범한 욕망에 따르는 이와의 갈등 관계를 만들어내고. 추리 소설이면서 사회 소설의 성격도 갖기를 바란 듯한 의도로. 결말은 작가의 소설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부조리한 상황과는 달리 갈등이 풀려서 모두들 평온을 되찾는다는 식으로 되었고(이 점이 나에게는 지루한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추리소설은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독자가 얼마나 그릇된 방향으로 상상하도록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슬쩍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