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쪽으로 정녕 소질이 없던 내가, 조금이라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이 모자라면 그 대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내가, 말이 안 된다 싶으면 아예 생각도 하지 않던 내가 이만큼 읽고 있으면 이 세계의 세계관을 제법 익힌 셈이 되었을까. 아직도 남들보다야 한참 아래이겠지만 나 자체의 수준 그래프로 따져 본다면. 그렇다고 믿으려고 한다. SF소설을 계속 읽고 싶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 소설가의 것이든 외국 작가의 작품이든.
이 작가의 글은 놓치지 않고 보려고 하는 중인데 여전히 푹 빠져들지는 못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도 가려진다. 내 취향, 좀 아닌 취향으로. '접히는 신들'이 아주 좋았다. 이런 상상력은 기발하다 못해 배우고 싶다. 못 배울 걸 아니까. 그리고 또 내용까지 믿고 싶다. 그렇게 되었으면, 이미 그럴 수 있을지도. '인류의 대변자'는 잠깐 많이 웃었다. 이런 유머도 좋아한다. 딱 우리나라의 현실을 건드리면서 딱 웃고 싶은 만큼 비꼬는 태도. 소설이니까 가볍게 대할 수 있으면서도 무게는 오래 남는다. 그래, 우리가 이런 곳에 이런 시절에 살고 있는 것이지. 외계인이 우리의 서울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수요곡선의 수호자'는 서글픈 마음으로 읽었다. SF라는 영역 자체가 서글픈 속성을 갖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막상 만나면 새롭게 서글퍼진다. 우리가, 우리 인간이,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기술이, 고작 이렇게밖에 못 되나, 한탄하게 되면서.
책 제목으로 쓰인 '미래과거시제'는 앞서 읽은 시간여행을 다루었던 다른 작가의 소설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읽기에 방해가 되었다. 내 독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새롭고 다른 인상으로 나를 이끌었으면 좋겠는데 겹치거나 본 적 있는데 싶어지면 그만 관심이 옅어지고 만다. 다른 기억력은 현저히 떨어지면서 이런 인상에 대한 기억은 왜 이리 강하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쓴 작품이라는 '임시 조종사'는 작가가 염려한 대로 읽기 힘들었다. 입말로 된 글이라 글말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읽기가 퍽 어려웠으니까. 판소리 대본을 귀로 듣는 대신 눈으로 보는 게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판소리 자체에 흥미를 못 느끼는 탓이 클 수도 있고.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는 실린 글 중에 가장 읽기 어려웠다. 파열음을 낼 수 없다는 소설의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자꾸만 맞춤법을 맞추면서 읽으려는 내가 안타까웠으니. 웃음마저도 지우게 될 정도로.
우리 소설에서 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을 알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읽는 일밖에 없고, 읽는 것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