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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들
그 시절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가슴이 뛰었다
주먹대장
200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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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기 위하여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사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대학교 2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이 시집을 읽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름대로 정의감이 끓어오르던 시절, 시인의 단아하면서도 굳은 의지가 담긴 시편들은 내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얼마 뒤 헌 책방에서 이 시집을 발견하고 사서는 읽고 또 읽었다. 가뜩이나 주황색이라 잘 보이지 않던 시집 옆면의 제목은, 지금은 색이 다 바래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이 책은 내 서가랄 것도 없는 책꽂이 한 귀퉁이에 꽂혀 있다. 마치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처럼 말이다. 새 책을 사지 못했던 것이 아쉽지만 당시에 이 책이 눈에 띄는 순간 사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정희성 시인의 이 시집에는 70년대의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과 분노가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 그 사슴은 어찌 되었을까요'나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등의 시를 보면 고통 받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사랑이 짙게 배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애정은 그들에게 그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시대의 아픔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곧은 목소리로 시집의 여기저기에 표현되어 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쇠를 치면서', '새벽이 오기까지는' 등의 시가 그것으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러한 현실과 맞서며 '봄'과 '새벽'으로 상징될 수 있는 밝은 미래에 대한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시가 ‘이곳에 살기 위하여’였는데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라는 시구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라는 구절에서 눈을 감을 줄 모르는 물고기의 모습에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지 않으려는 시인의 자세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정희성 시인의 시를 보면 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의연하면서도 확고한 지사적 풍모를 발견할 수 있는 시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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