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읽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뭉크의 작품 ‘절규’에 관한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다. 예술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 노르웨이까지 날아간 저자의 충동적 삶이 부러웠고, 뭉크가 살아온 끔찍한 삶에 대한 공감 때문에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감정이입을 하는 공지영의 개인적인 아픔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술 작품은 반드시 저자가 살아온 삶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지만 바른 감상이 될 수 있다. 5살 때 결핵으로 어머니가 죽고 누나 소피 역시 같은 질병으로 죽자 이모와 아버지가 아이들을 키우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가난과 광적인 믿음으로 인해 공포, 슬픔, 죽음은 뭉크의 삶을 떠나지 않는 나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장 과정은 뭉크로 하여금 고독과 불안, 공포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게 했고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를 일으킬 정도의 명작을 탄생시킨다.
이마를 스쳐가는 바람처럼 약간의 충동이 마음속에서 인다면 노르웨이 오슬로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통영 정도는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그것도 그냥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작가 공지영처럼 분명한 이유를 가진 문학기행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통영에는 나의 10대 시절부터 친숙한 이름인 김춘수, 유치환, 박경리의 문학관과 백석의 시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살 시절 두 살 연상인 여인에게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봉함엽서는 하얀 백지였기에 연필과 30센티 자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줄을 친후 Pilot 잉크를 찍은 펜촉으로 정성스럽게 한자 한자 예쁘게 적어 나가야 한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후에 편지가 완성되면 이번에는 지우개를 가지고 연필로 줄을 친 자국을 지워 나간다. 입으로 불고 손으로 털어 지우개에서 떨어진 불순물을 제거한 후 마지막은 입술에 침을 묻혀 엽서를 봉한 후 빨간 우체통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일까? ‘Sealed With A Kiss’(키스로 봉한 편지)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같은 심야 DJ 프로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곡이었다. 그리고 모든 편지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는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시인은 ‘꽃’은 의미를 피워내는 형이상학적 존재라 말했지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꽃’은 언제나 불러도 달달한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인의 생각과는 달리 ‘꽃’은 김춘수를 대표하는 시가 되었는데 아이러니다. 1922년 통영 동호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춘수를 기리기 위해 통영 시민들은 ‘꽃’ 시비를 건립하고 통영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평동에 김춘수 유품 전시관을 개관했다. 이곳을 돌아보며 이제는 얼굴도 희미하고 이름도 헷갈릴 수 있는 첫 사랑을 기억한다면 삶은 그렇게 쓸쓸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은 머무르고 싶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긴 세월이 지나도 가슴속에 남아 있다고 했나?
영화 ‘모던보이’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백석은 흑백 사진 몇 장만으로도 얼마나 미남인지 알 수 있다. 이 잘 생긴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이유는 그가 재북시인이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나뉘자 백석은 고향인 정주로 갔고 그곳에 남아 북한 문단에서 활약했기에 90년 대 전까지는 백석이란 이름을 부를 수 없었고 그의 시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월북, 재북 작가들의 복원이 이루어지며 백석은 현 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린 시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직도 백석은 시보다는 그의 사랑이야기로 더 알려진 있는 듯하다. 특히 기생 김영한(자야)와의 관계는 고전적인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생과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집안이 극구 반대했고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는데 남과 북을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없게 된다. 자야는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고 1996년 1000억 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다. 한 신문기자가 “자야에게 1000억 원이 아깝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자야는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라고 답했다고 한다.
‘남자는 첫사랑을,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야에게 백석은 마지막 사랑이었나 보다. 그런데 백석의 첫사랑을 통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24살의 백석은 충렬사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렸는데 통영 출신인 이화고보 학생 박경련이다. 그녀에게 반한 백석은 1936년 1월, 3월, 12월에 걸쳐 통영을 찾는다. 마지막 방문이 된 12월에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통영을 방문해 박경련의 어머니에게 딸과 혼인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박경련의 집안은 백석에 대한 뒷조사를 하는데 백석의 친구인 신현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놀랍게도 신현중은 백석의 절친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말한다. 이 한마디로 인해 백석과 박경련의 혼사는 깨지고 만다. 더 놀라운 일은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박경련이 결혼한 것이다.
청혼을 거절당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빼앗긴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백석은 그 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의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에서
백석은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지 않고 그저 생각만 할 뿐이다. 홀로 아파하고, 홀로 웃어 넘기며 그의 시는 탄생됐을 것이고, 그 고통을 함께 느끼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으며 감동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 친구를 배신한 사람의 이름은 잊어도 백석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생각에 우리 모두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충동적인 여행은 내 마음이 부서지기에 가능하다. 누군가로 인해 상처 받았을 때, 사는 것이 자신 없을 때,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은 단절이 있을 때 우리는 여행을 꿈꾼다. 그곳에서 부는 바람이 내 영혼을 위로하고, 한 밤중의 파도가 내 마음을 씻겨줄 것 같은 환상이 있기에 떠나고 싶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상처 입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작가 공지영이 뭉크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난 것도 ‘절규’를 보며 공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통영을 가고 싶은 이유도 동일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기에 따돌림을 당했고 유정회 국회의원이 된 것을 가장 부끄럽게 여겼던 김춘수에게 필요했던 것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란 간절한 호소였을 것이다. 당대의 바람둥이였던 백석의 사랑도 상처에서 시작되었다.
목회도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다. 좌절, 두려움, 불안이 일상의 친구처럼 가까이 와 있기에 새벽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기에 기도는 처절한 내면의 고백이다. 통영의 여행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절절한 아픔과 고통, 좌절을 이겨내며 별이 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통영에서 잠시 공지영이나 뭉크, 김춘수, 백석의 책을 읽으면 어떨까?
정현종은 그의 시 ‘방문객’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여행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만나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그들의 삶에서 배운 것이 나의 기도가 되고 내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할 수 있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이렇게 축복하신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