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백년을 살아보니 :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네
며칠 전 아버지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제 곁을 떠나신 지 30년이 넘었으니까 잊힐 만한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지는 이유는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는 언제나 요람을 그리워하며 술을 드셨습니다. 평안남도 정주가 고향인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 재산 등 사랑하는 모든 것을 두고 홀로 월남하셨습니다. 서울에 정착하셨지만, 마음은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셨기에 부초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그 모습이 싫어 수많은 애증을 드러내며 아버지와 반목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어느덧 50대 후반에서 60살을 바라보는 동생들과 매제들이 모였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보다 아버지를 회고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오늘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눠 볼까?”라며 운을 띄웠습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되는데 1968년 7월 15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이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발표한 거야. 은행알을 뽑아 중학교에 배정 받았는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에 당첨되었어. 이때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술을 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도 세일이가 공부 잘하는 것을 아시고 사대부중에 입학하게 하셨어요” 순간 난 부끄러웠어.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셨잖아. 그만큼 아버지는 뽑기지만 사대부중에 입학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거야.“
“나는 등록금이 밀렸어도 오빠는 꼭 아버지가 학교에 가셔서 등록금을 내주셨어.”
“명절날 옷 사줄 때도 오빠는 항상 제일 비싸고 제일 좋은 옷을 입었어.”
동생들은 한결같이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특혜를 이야기했습니다. 오직 저만 그 과분한 사랑을 알지 못했기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다다른 때도 있었지만 이제 증(憎)은 사라지고 애(愛)만 남았기에 가끔은 홀로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지을 때가 있습니다. 아내를 처음 인사시킬 때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인해 눈만 살아계셨습니다. 아내가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손을 잡는 순간 그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자리에 함께했던 모든 가족 누구나 할 것 없이 울었습니다. 이제 그리움의 대상인 아버지가 올해 탄생 100주년이라고 막내가 말했습니다.
100세 시대가 되었기에 “조금만 더 사셨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무기력한 삶을 사셨던 아버지도 마음속에 많은 회한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아버지 나이가 되니까 그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아들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아버지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하셨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삶의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인생의 황혼기를 맞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민이나 걱정, 근심이 아니라 노년을 인생의 황금기로 만든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인생을 배운다면 노년이라 할지라도 삶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인턴(The Intern, 2015)
은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는 영화입니다.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장점이기에 영화관을 나설 때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미를 바탕으로 거칠고 단순 무식한 성격의 캐릭터에 잘 어울렸던 로버트 드니로가 이 영화에서 변했습니다. 70세의 벤(로버트 드 니로, Robert De Niro)은 자신의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결심을 합니다. 은퇴한 남자들이 제일 무기력해지는 것은 소속감을 잃어버릴 때입니다. 한때는 직위도 있었기에 아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지위를 잃어버렸을 때 함께 떠나고 말았습니다. 벤은 이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직장을 찾습니다. 다시 어딘가에 소속이 되고,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때 인생은 활력 있게 돌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벤은 직장에서 꼰대가 아니라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따르는 직원들도 많고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모든 직원을 보듬어 안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륜을 바탕으로 훈계나 주장을 한다면 꼰대일 수 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마음으로 안아준다면 진정한 어른이라는 것을 마이어스 감독은 관객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웃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이를 핑계 삼지 않고 자기 일에 충실하다면 잘 늙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벤과 자신을 견주어 보면서 영화를 본다면 감동의 깊이가 더해지겠죠?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란 멋진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그림을 그린 모지스 할머니의 자전 수필입니다. 1860년에 태어난 그녀는 12세부터 15년 정도 가정부 일을 하며 어려운 환경을 이겨냈습니다. 이때 남편을 만난 후 버지니아에서 농장 생활을 시작해서 뉴욕 이글 브리지에 정착하며 열 명의 자녀를 출산합니다. 전형적인 농경사회를 살았기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인상을 주고 있었던 저자는 농한기 때 소일거리 삼아 간간이 자수를 놓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관절염이 생겼고 그 때문에 수 놓는 일이 어려워지자 모지스 할머니는 바늘 대신 붓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76세였습니다.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고 남들이 포기하고도 남을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그림 속에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적이고 따뜻한 농촌의 풍경이 살아있는 할머니의 그림은 어느 수집가의 눈에 띄어 세상에 공개됩니다. 이때부터 그녀의 삶은 시온의 대로가 열린 것처럼 거침이 없습니다.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 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가 100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 미국 정부는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선정했습니다. 그녀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신이 기뻐하시며 성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나이가 이미 80이라 하더라도요.”
나이를 의식하게 되면 삶은 불안이나 근심, 걱정으로 가득하게 되죠?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란 생각이 들 때 모지스 할머니의 삶을 기억한다면 인생은 다시 무지개가 뜰 것입니다.
백 년을 살아보니
97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인생론이 담겨있는 이 책은 ‘사랑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네!’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도 한때는 암흑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열등감과 무기력함 때문에 인생이 잿빛으로 물들 때 저를 위로해 준 책이 있는데 김형석 교수의 에세이집이었습니다. 그의 대표 에세이 전집 10권을 들고 집으로 들어설 때의 기쁨은 아직도 제 인생에서 전율로 남아 있습니다. 목회에 실패하고 7000권 정도의 책을 정리할 때 마지막까지 김형석 교수의 전집은 제 옆에 있었는데 책 500권 정도를 진열할 공간이 없어 울면서 이 책도 저와 이별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김형석 교수는 살아계시고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요즘 이 분의 책이 5-6권 정도 출간되었는데 꼭 읽어 보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한때는 책 속의 많은 구절을 암송했지만, 지금은 거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데 아직도 자신 있게 외우는 김형석 교수의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가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낳지 않을까?’
이 한 구절이 제 인생을 지배했고 지금도 이 가치관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삶을 돌아보면 자신을 고집하지 않았기에 실패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착하다”라는 말은 반복해 듣고 있지만 이 시대를 사는 데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는 날까지 착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이 들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거운 질문이지만 영화 인턴의 벤이나 모지스 할머니, 김형석 교수를 통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신뢰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 가치,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한 긍정은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란 생각을 합니다.
아! 노년을 대표하는 멋진 사람. 갈렙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갈렙이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되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지 45년이 지났음에도 "너희들이 믿음으로 나아가 가나안 땅을 발로 밟으면 그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45년을 한결같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살아왔습니다. 지금 갈렙은 나이가 85세입니다. 이 나이면 편안하게 집에 앉아서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존경받는 원로입니다. 자신이 원하면 가장 좋은 땅을 가질 수도 있는데 그는 여호수아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내가 나이는 85세지만 나의 힘이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지금도 전쟁터에 나가서 얼마든지 싸울 힘이 있습니다.“갈렙의 고백입니다.
8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쟁터로 나가는 갈렙의 자세야말로 노년의 삶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도전이고 격려가 되겠죠?
나이 들수록 원대한 계획이나 꿈보다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일까요? 갈렙이 답을 해주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