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오래 살았지?”
전북 진안군 주천면 버스 정류소를 52년 동안 지킨 김영석 옹이 친구와 나눈 이야기다. 1960년 시골 버스 정류장 소장으로 부임해 지금까지 일해 온 여든 여덟의 김 옹. 젊은 시절에는 지갑이 두둑해 흐뭇했던 적도 있었다. 주변에서 유일한 버스 정류장이라 사람들이 붐벼 어깨에 힘주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말에 권위가 서던 때도 물론 있었다. 지금은....다 지난 일이다. 짧은 시 하이쿠가 떠오른다. '홍시여, 너도 한 때는 떫었었지.'
『모든 날은 인생이다』는 정성이 엿보이는 책이다. 강신재는 1년 동안 취재해서 이 책을 썼다. 신빛(!)의 사진 역시 새롭게 빛난다. 저자는 전국을 돌며 ‘오래된 공간을 지키는 사람들과 오래된 업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났다. 늪지기, 여인숙 주인, 공양주, 장의사, 칼갈이 같은 사람들이다. 이름도 생소한 돛배 어부, 혁필 화가들도 만난다.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갑남을녀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내공이 단단하다. 우포 늪을 지키는 주영학씨는 “내 몸에 1억 4천 년의 시간이 흐른다”고 일갈하고 돛 배 어부 최삼열 씨는 “배는 온 몸으로 모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대장장이 박경원씨는 이렇게 말한다.
“숭례문 복원하는 데서 와서 대장간 일 시연해 달라는데, 우리는 안 갔어. 문화재 담당하는 사람들이...대장장이는 인정을 안 해 주거든. 교수라는 사람들이 이론으로나 알지, 실제로 뭐가 어떻게 맨들어지는지 어떻게 알아. 그럴 땐 나하고 맞지 않으니까 그냥 가, 그러고 말지.”
왜 그랬을까?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수록된 작품 <대장간>을 보고 왔는지 “책 만 보구 와서는 대장장이는 앉아서 집게질을 하고 어쩌구....”하더란다. 박씨는 “여보, 서서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앉아서 무슨? 그건 풍자야 풍자. 어디까지나 만화라구.” 어디까지나 만화인 것을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무식한 걸까, 평생 대장장이 일만 해 온 박씨가 무식한 걸까. 개신교도였으나, 장애인 아들 때문에 서울 끝자락의 절간에서 공양주를 하는 김용순씨.... 처음에는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뭘 얘기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손사래를 치던 그가 “꼭 경책을 들고 목탁을 쳐야만 불도를 닦을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 스님이 주장자 들고 설하는 법문만이 불교의 지혜는 아니겠지.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승부를 걸어서 나의 일로 도를 튼다는 마음으로 살아”라고 말한다. ‘공양주 생활 3년 공덕이 수행자 생활 10년 공덕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는데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면 저절로 도가 트는 법일까?
도대체 하나의 일을 얼마나 해야 좀 한다....고 할 수 있을까. 65년 동안 수제 구두를 만들어 온 양근수 씨는 처음 5년 동안은 바느질 조금, 사포질 조금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단다. 세월이 지나 구두 만드는 일에 익숙해지자 구두 한 켤레에 쌀 한 가미를 받기도 했다. 직원 7~8 명을 두고 새벽 두 시까지 일도 했다. 지금은.....수선 손님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도 역시 홍시였다. 우리는
누구나 한 때 홍시였다. 오래 전 인도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인도의 전통 춤 카탁을 배우는 곳에 방송 촬영을 하러 갔었다. 마스터 클래스였는데, 우리로 치면 인간 문화재 쯤 되는 어르신이 가운데 앉아 있고 그의 앞에는 15년 이상 배운 학생들이 앉았다. 그 다음에는 10년 이상, 맨 뒷줄에는 5년 이상 되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촬영 팀이 외모가 멋진 여학생을 불러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하자 어르신 선생님이 퇴짜를 놨다. “7년 배운 것으로는 안 돼..... 최소한 10년은 되어야지.”
그게 달인의 정신이다. 1년 배운 걸로 남을 가르치고, 2년 배운 걸로 자격증을 따서 선생 노릇을 하는 것은 『모든 날은 인생이다』의 모든 주인공들에게는 코미디 같은 일이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온 장인들이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아주 단순하다. 돈 벌었을 때.
“홍은동 쪽에 움막을 쳐서 밤에는 작업을 하고 낮에는 장사를 하러 다녔지. 그러다 몇 천 원이 손에 들어오면 얼마나 기뻤는지. 하루 종일 그 돈을 손에 쥐고 리어카를 끌었다니까.” 행복은 그런 거다.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면 행복하고, 주머니가 썰렁하면 불행한 거다. 이 간단한 진리를 거부하면 살기 힘들어 진다. 젊었을 때 우리는 종종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결국 나이가 들면 돈이 없으면 너무 쉽게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인숙을 30여 년 동안 해 온 함양의 마민정 씨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하다. 시집살이에 여인숙 일까지 고되었던 그녀, 전처소생의 자식들 네 명이 폭력까지 행사하자 가출을 결심한다.
“갈라 카믄 지키고 섰고, 못 나가고 들어오면 자슥들 때문에 남편과 밤새 싸우고. 그러다 날 새면 밥을 해야 될 꺼 아니래. 밥해주고 치우고 청소하고 진짜 갈라 카믄 또 점심 때가 되는 거라요. 점심 차려주고 그릇 치우고 빨래 하믄 또 밥 때가 되고. 가는 여자가 물 여다놓고 간다 카더니 내가 진짜 물 여다 놓다가 고마 세월을 그래 보냈어.” 마씨의 말을 듣고 나니 얼마 전 우리 어머니 김성자 여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열다섯에 부엌에 들어가서 정신차려보니 일흔 한 살이 됐어.” 『모든 날은 인생이다』의 저자가 왜 우리 어머니는 인터뷰하지 않았을까? 우리 어머니뿐이랴? 한 때 홍시였을 얼굴에 검버섯 핀 대한민국의 모든 어르신들은 왜 인터뷰하지 않았을까? 저자 대신 내가 말하리라. 당신들의 모든 날이 곧 찬사 받아 마땅한 최고의 인생이라고. |
[오늘의 북멘토] 명로진 | 배우, 인디라이터 |
스포츠 조선 사회부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드라마에 데뷔한 이후, 방송, 영화, 연극 무대를 종횡무진 활동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EBS FM에서 [명로진의 책으로 만나는 세상]을 진행하고, 문화 컨텐츠 아카데미 앰버서더로 활동하는 등 인디라이터 겸 방송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