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
제2강 - 궁형의 치욕을 <사기>로 승화시키다
로버트 카파 (1913-1954)
전쟁 사진의 전설로 불린 포토저널리스트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41세로 사망함
1. 사마천의 탄생
유협열전(游俠列傳)
사기 권 124의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하고 권세가들을 혼내주는 협객들의 이야기
곽해(郭解) - 사기 권 124 유협혈전에 나오는 한무제때의 대협객
사마천이 본 곽해의 첫인상
내가 곽해를 보았을 때 생김새는 보통 사람보다 못했고 말솜씨도 배울만한 것이 없었다.
사마천의 출생에 얽힌 비사
BC 135설 – 9살
BC 145설을 지지하는 이유 – 곽해를 보았을 때 19살
9살 아이가 어떻게 곽해의 인상을 기록할 수 있을까? 그래서 145년 설이 유력
2. 사마천의 고향
1) 서안(西安 장안)에서 220KM 떨어진 성서성 용문(한성시)에서 태어남
용문(龍門) - 황하 5500KM중 3/4이 끝나는 지점으로 빠른 물살 때문에 고기들이 거슬러 올라감 – 성공하면 용이된다는 전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등용문(登龍門 - 용문에 오른다는 뜻으로 입신출세의 관문을 일컸는 말) 사마천이란 인물을 탄생 시킨 것이 우연은 아니다.
서촌(徐村)에서 19살까지 농사, 공부 가축등을 키우며 자람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읽는다는 뜻.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공부함을 이르는 말.
2) 사마담
아버지는 사마담으로 한나라 조정에서 태사량을 지냈다. 태사량은 문서를 관리하거나, 제사를 관장하는 직책이다. 사마천은 19세 때 수도 장안으로 이사
이 당시 한 무제는 무릉(茂陵 : BC 139년 한 무제(武帝)가 자신을 위해 장안성 80리 밖에 조성한 능원.)을 만들기 위해 신도시를 건설했다. 무덤은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착공을 한다. 왜냐하면 왕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진시황제의 경우 무덤을 짓는데 40년,(16살 즉위 아들대에 완성) 한무제(13세때 즉위 54년 동안 무덤을 만듬. 70세 완성) 만들었다. 이런 무덤 조성을 위해서는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하므로 자연스레 무덤 주변에 신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이곳에는 부자들, 말썽 많은 사람들, 명망 있는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래서 사마천 집도 장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사마천은 이때 새로운 문물과 접함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이 20세가 되자 중국 전역을 도는 여행을 보내줌
일본 속담에 “자식을 사랑하면 여행으로 보내라.” 서양 속담에 “여행하는 자가 승리한다.”
사마천의 여행은 2년 정도 걸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 부분은 사기열전 마지막 권, 사마천의 자서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사마천이 「사기」집필 경위와 출생 및 가계도 등을 기록해 놓은 「사기」의 마지막 권에 현장의 생생한 기록이 있다. 여행은 사마천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화점이 된다. 사기는 현장의 생생한 기록이다.
예로
한신(韓信 ? ~ BC 196)
한(漢)나라 건립시 군대를 지휘해 크게 공을 세워 초왕이 됐지만 제국의 권력이 확립되자 숙청된 무장. 그가 젊었을 때, 저자거리에서 건달들과 시비가 붙게 된다. 이 때 한신은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지나가는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책에 기록이 없기에 사마천이 고향을 직접 찾아가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이다.
과하지욕(袴下之辱)
한신이 기어서 남의 가랑이 밑을 빠져 나갔다는 뜻.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연연하지 않음을 비유한는 말.
유방(劉邦 BC 247 ? ~ BC 195)
중국 한(漢)나라의 제 1대 황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
항우(項羽, BC 232 ~ BC 202) -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과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 해하 전투에서 유방에게 포위되어 자살함.
유방이 항우에게 쫓겨 도망가는 중에 불리하게 되자 자신의 자식들을 수레에서 밀어낼 정도로 독한 사람이었다. 또 아버지와 부인이 항우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항우는 이들을 팽형(烹刑 : 고대 사형제도 중의 하나. 죄인을 기름 가마솥에 넣고 삶아 죽임을 뜻하는 말.)에 처하겠다고 위협하자, 유방은 ‘다 삶거든 나도 한 그릇을 달라’라고 응수할 정도로 성격이 독하고 배짱이 있었다. 이런 기록들은 황제의 어두운 면이기에 서책으로는 찾기 힘들다. 이런 이야기는 사마천이 그 고장을 직접 찾아가 들어야 한다. 다 여행에서 들은 이야기 일 것이다.
유방의 성공요인에 대해 이종호는 후흑(厚黑) - 얼굴은 두껍고 심장은 검어야 한다.
그후 35살까지 사마천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데 아마 동중서나 공안국의 책을 중심으로 공부했을 것이라고 추정
36살 때 한무제의 명으로 서남이 지방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음
사마천이 36세 때, 한 무제가 태산에서 봉선(封禪 : 고대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내던 일)을 지냈다. 사마천도 이를 참가하기 위해 가던 중 아버지 사마담이 쓰러졌다는 전갈을 받고 아버지를 찾아가게 된다. 아버지가 쓰러진 이유는 봉선제를 올리기 위해 논쟁이 오가던 중 한 무제가 마음에 드는 몇몇 방사들만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마담은 제사를 주관하는 책임자였지만 따라가지 못해 홧병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된다.
그 유언은 가업을 이어 역사를 써라. 그래서 사마천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태사량이 된다. 태사량이 된 사마천은 우선 달력을 정비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태초력을 만들었는데 이는 사기를 쓰는데 밑바탕이 된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학문이다.’ 때문에 달력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이것으로 시간 관념의 계기를 만들었고 여행은 공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경험이 중요하다.
42 –43살때부터 사기 서술에 착수.
이때까지만 해도 사마천은 사기를 선대의 업적을 찬양하고, 기리는 역사서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47세때의 사건으로 인생이 바뀜
사건의 발달은 이릉(李陵 ? ~ BC 72 : 중국 서한 때 무장. BC 99년 보병 5,000명을 이끌고 흉노족의 대군과 싸워 격파했으나 식량이 떨어져 흉노의 원군에게 포위되어 항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릉은 흉노(匈奴 : BC 3세기 말에서 AD 1세기 말까지 중국의 북방에서 활동한 기마유목민족)에 5,000명을 이끌고 여러차례 싸웠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 :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함.)으로 지고, 400명만 살아 돌아오게 되고 이릉은 흉노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릉이 항복하자 한나라 조정은 이릉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에 한 무제는 이 사태에 대해 사마천에게 묻는다. 이에 사마천은 이릉을 적극 변론을 한다. 이 당시 총 대장은 이광리(李廣利, ? ~ BC 90: 중국 서한 때의 무장. 누이가 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장군에 봉해짐)였는데 사마천의 변론은 이광리를 비판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에 이광리를 총애하던 한 무제는 화가나 사마천을 옥에 가두게 된다. 이때 사마천 나이 48세였다.
한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 시키고, 사마천 또한 사형언도를 받는다. 이 당시 한나라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50만전(속전)을 내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궁형(宮刑 : 사형(死刑) 다음 가는 중형으로 남녀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당하는 것이다.
이때 사마천은 궁형을 자청한다. 왜냐하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를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죽음이 있다.”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한 개의 털이라는 뜻으로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일을 비유하는 말.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후 죽는 것
사마천은 자신은 이미 죽었는데 가볍게 죽을 것인가, 무겁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한 것이다.
50세에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내시가 되지만 사기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사기는 궁형을 당하기 전과 후가 틀리다. 전에는 제국 찬양했지만, 후에는 세상, 인심, 세태를 다시 보고 통찰함. 비판적 시각이 들어간다.
3) 사마천의 죽음
아직 미스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