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을 읽기로 결심했을 때 <소년이 온다>는 되도록 나중에 읽고 싶었다. 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 온 작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사회 문제를 다루기로 마음먹기까지 일련의 과정의 있을 것 같았고 그 과정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소년이 온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로 시작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을 부지런히 읽었고 이제 드디어 <소년이 온다>를 펼쳐들 시간이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 열다섯 살 동호는 친구 정대를 찾아 합동분향소가 세워진 도청 상무관에 갔다가 그곳에 먼저 와있던 수피아여고 3학년 김은숙, 미싱사 임선주의 부탁을 받고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얼마 후 도청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이들은 시신을 두고 밖으로 나갈지 아니면 안에서 계엄군을 맞을지 고민한다. 계엄군의 총소리가 도청을 중심으로 온 도시에 울려퍼진 그 날이 지난 후, 은숙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지만 검열에 걸려 경찰에게 피멍이 들도록 뺨을 맞는 폭행을 당한다. 선주와 진수는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극렬분자', '빨갱이'로 분류되어 성기 고문, ‘모나미 볼펜’ 고문 등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렀던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p.206)
젊은이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동족의 군인들이었다. 작가는 집필에 앞서 5.18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으려 했지만 두달 여가 지나자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아무 것도 읽지 않고 5.18 관련 자료만 읽다 보니 밤마다 군인들에게 쫓기거나 그들이 들이민 총검에 찔리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이라도 이렇게 공포스러운데 현실에서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들을 유린한 군인들은 과연 어떤 낯짝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군인들이 한 해 전 부마항쟁을 잔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던 이들, 베트남전에서 몇백만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닐까 암시한다. 그리고 이들의 핏줄이 2009년 1월 용산에서, 2014년 세월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라고 적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p.212) 작가는 인간의 잔인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잔인성을 강요하는 권위 앞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인간도 있다는 믿음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작가가 재조명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4)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에 이어 <소년이 온다>를 읽으니 작가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은 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작가는 이토록 잔혹하고 폭력적인 사회를 다름 아닌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고 그런데도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지 갈등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채식주의자>에선 육식을 거부하다 못해 스스로 식물이 되기를 택한 영혜를 통해, <바람이 분다, 가라>에선 짐승마냥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들 속에서 바로 살 수 없었던 두 친구 정희와 인주를 통해, <희랍어 시간>에선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빛을 일어가는 남자를 통해 잔인한 세상에 순응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렇다면 <소년이 온다>에선 어떨까. 이 소설은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만 외려 작가의 문제 의식이 가장 극대화된 듯하다. 사회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 만큼 폭력적이다. 사람들은 집문을 걸어 잠그고 두 귀를 틀어막고 점점 그 사건을 외면하고 잊어버린다. 그런데도 사회의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차마 저항하지 못했어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저항했던 사람이나 저항하지 않은 사람이나 이 사회에 거대한 악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한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함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믿음은 스스로 증명하지 않는 한 미신(myth)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하라는 것을. 벼른 끝에 이 책을 읽은 마음이 가볍지 않고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