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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말

[도서] 박경리의 말

김연숙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그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늘 마음속에 못다한 숙제처럼 남아있는 책이 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과 박경리 선생의 "토지"가 그것이다.

한국문학에 대해 공부한다면 응당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으니, 양심의 가책이 당연한 것이었다.

시간을 제대로 갖고 읽어보자하고는 차일피일미루다가 다시 한 번 나를 채찍질하는 책을 만났다.

바로 김연숙 님의 "박경리의 말"이라는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토지인물사전처럼 토지 속의 중요한 글귀들을 풀어서 해설해주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토지]를 전체적으로 훑어서 읽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토지]를 읽으면 인물이나 내용의 이해가 잘 될거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 속에 나오는 말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그 말들이 나오게 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며 토지의 내용도 요약해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박경리 선생의 말이 저자를 통해 한 번 가공되어 나오는 제3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책은 [토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저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는 흘릴 만큼 흘려야 병은 치유되는 법이다."  (토지 6권 48쪽)

결국 아들만큼이나 아비의 마음도 헝클어져버립니다. 이 모든 상황을 매듭짓듯이 내놓은 아비의 말이 "피는 흘릴만큼 흘려야 병은 치유되는 법이다"였습니다.   _p.24

어쩌면 부모에게, 공평하라는 그 요구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부모와 자식, 참 알쏭달쏭한 관계입니다. 하나인 듯 둘인 듯... 그 관계는 원래 출발점부터가 기묘합니다. 우리말 '홑몸'은 아이를 배지 않은 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겹몸'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아이를 가진 엄마가 '홑몸'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른 둘이 포개진 두 사람도 아니라는 겁니다.  _p.26


가끔 딸아이와 통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눈빛이나 표정으로 통할 때도 있고, 감정으로 통할 때도 있다. 아마 아이를 낳아본 엄마는 그 교통과 묘한 끌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아파할 때는 대신해서 아파주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특히나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이 지켜보기만 해야할 때의 마음. 작가의 말처럼 헝클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내 뱉은 말이 "피는 흘릴 만큼 흘려야 병은 치유되는 법이다"는 아비의 말이었다.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다. 물이 비워야 없어지듯, 아픔도 도려내야 낫는 것이다.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처럼.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토지 17권 359쪽)

삶의 무게를 견디고 살아남은 자의 회한 젖은 말이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였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왜 모두들, 보통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까지도 이 말에 그리 젖어들었을까요. ~ 우리 인간을 하나의 범주를 묶을 때 그 공통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고통'입니다.  _p.33

고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나 다름없다 싶습니다. 그러하니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라는 '한복'이의 말이 서로 다른 우리 모두를 공명시켰나 봅니다. ~ 하지만 이 공통경험이 '참말로 공평'하다지만, 기묘하게도 또 이들은 온전한 '나만의'것입니다. ~ 아무리 극심한 몸의 고통도, 그 어떤 정신적 고통도, 그 아픔은 온전히 나만의 것입니다.  _p.34~35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통을 '위험한 기회'로 삼고,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나는 고통을 겪기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다름'이 좋을지 나쁠지 불확실하다는 위험은 여전하지만, 하여간 그렇습니다. ~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과정뿐입니다. 그러니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설혹 그 과정이 엄청난 고통의 연속일지라도, 그 앞에서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_p.38~39


이 책을 읽으며 가끔 웃기도 하고, 가끔 눈물 흘리기도 하고, 가끔 먹먹해 지기도 했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이 말은 가장 먹먹하게 만든 말이었다. 내가 살아보겠다 택한 삶도 아니고, 내가 살아보겠다 택한 환경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상황이 닥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참 숨이 막히는 삶이다. 숨이 막히는 중에도 숨 쉴 구멍을 찾아 숨을 쉬는 건 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자유" 덕분일 것이다. 내가 택한 삶은 아니지만, 삶의 과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그나마 숨을 쉴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그래! 결심했어!"로 갈라지는 몇 개의 인생처럼 내 삶도 내 결심과 결정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니 그 결과는 알 수 없으나 고통의 연속인 삶이라도, 숨이 탁탁 막히는 삶이라도, 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 가자, 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산 보듯 강 보듯, 가자!"  (토지 6권 370쪽)

그러고 보니 노화란, 나이 들어 세상과 다시 관계 맺으라는 신의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이 듦이 자연의 섭리라면,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멀리 바라보라는 그런 도리를 일꺠워주는 것이다 싶습니다.  _p.59

자기 집착을 벗어난 자, 자기 중심을 벗어난 자, 그리하여 새로운 거리 감각을 확보한 사람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무심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말합니다. "어 가자, 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산 보듯 강 보듯, 가자!"  _p.64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부정하던 때가 있었다. 기쁘면 실컷 기뻐하고, 슬프면 실컷 슬퍼하며 사는 게 진정한 인생 아닌가 싶어서였다. 이제 40이 넘어 저자가 말하는 노화가 가까이 오니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몇 일전 속초를 향하던 길에 바라본 태백산맥처럼 끝임없이 이어진 산맥을 바라보듯, 동해에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듯, 저자의 말처럼 산 보듯 강 보듯 그렇게 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늙고 못생겼으며 난쟁이같이 볼품없는 체구 그 어디에선가 풍겨나는 당당함,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토지 18권 368쪽)

'막딸이'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짊어지고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거대한 지붕을 사뿐히 얹고 있는 강철기둥처럼, 천 근 같은 삶의 무게를 얹은 채 살아갔습니다. 대단한 쾌거도, 놀라운 사건도 없이, 과시하는 바도 없이 '모름지기 짐이란 이렇게 지고 살아가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하니 그녀에게는 눈부시게 화려한 겉모습과는 상관없는, 삶의 당당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_p.89


막딸이에게 아로새겨져 있는 삶의 당당함이 무엇일까? 되새김해 본 글귀이다. 어렸을 때는 남보다 갖지 못한 것에 주눅들기도 했고, 남보다 배우지 못한 것, 남보다 잘나지 못한 것, 남보다 키가 크지 못한 것에 컴플렉스를 느끼며 괜히 구석으로 밀려나 있기도 했다. 지금도 남보다 좋은 집에 살지 못하고, 남보다 좋은 차를 타지 못하고, 남보다 수입이 많지 못하고, 남보다 아이가 많지 않고, 남보다 좋은 환경이 아닌 것만 생각한다면 구석으로 밀려날 이유가 충분하다. 비굘하는 "남"이 누구냐에 따라 아마 세상 많은 사람이 자신을 남보다 못하다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딸이가 그러했듯이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우리 모두는 비교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밤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의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토지 7권 402쪽)

카르카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조바심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이라고. "모든 죄를 파생시키는 두 가지 주된 인간적인 죄가 있느너데, 다름 아닌 조바심과 태만이다. 조바심 떄문에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주된 죄는 오로지, 조바심 한 가지인지 모른다. 조바심 때문에 인간은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 "철학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다. 삶을 다시 씹어 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애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_p.112~113


아이가 어렸을 때, 유치가 늦게 올라왔다. 책에 나오는 시기가 지나고, 또래 친구들도 다 올라오는데 딸아이만 올라오지 않는 유치를 보며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해보며 안해도 되는 걱정을 미리 사서 하기도 했고,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마음이 바빠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니 더디기는 해도 아이의 이는 무사히 올라왔다. 지금은 그 유치가 모두 빠지고 영구치가 예쁘게 자라고 있는 중이다. 때가 되면 아이의 이는 나게 되어 있다. 아이의 DNA에 이미 입력된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라는 말을 보며 그때의 내 모습이 기막히게 일치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때를 기다리는 일, 이르거나 더디더라도 마음 바빠하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는 일. 수많은 별들의 운행을 보고 조용히 깨달을 일이다.


"어중간히 눈 밝은 자들이 큰일이라. 결국은 순결한 마음 순박한 열정만이 저어 수만 리 장천을 나는 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게요."  (토지 7권 274쪽)

학습이란 말에서, '학(學)'은 배우는 것, '습(習)'은 익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습(習)'은 '스스로 자(自)'와 '날개 우(羽)'라는 글자를 합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새가 스스로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몸에 새기는 것이 익힌다는 뜻이며, 그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순박한 마음과 열정이야말로 배움의 근원인 셈이지요.  _p.145

박정태 선수는 시합의 승리도, 타율도, 타점 기록도 자신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궁극적 목표는 오로지 '매일의 연습량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표만 '무조건 열심히' 실행한 것이었고, 그는 대단한 선수가 되었고, 최고 기록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는 순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연습량을 채우고, 순박한 열정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쉼 없는 날갯짓으로 수만 리 장천을 날아가는 철새처럼 매일의 연습으로 야구의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_p.147


고교야구 선수인 규현이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열심히 하루하루"라며 답장을 보내온 아이. 돌도 되기 전부터 보았으니 꼬박 19년을 보고 있는 규현이에게 장천을 나는 철새의 순결한 마음과 순박한 열정이 있기를, 그리하여 박정태 선수처럼 하루하루를 만들어 나아가 또 다른 야구의 전설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 또한 나이에 굴하지 않고, 환경에 굴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날갯짓을 멈추지 않을 수 있기를 스스로 다짐하며.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  (토지 11권 296쪽)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도발적 문구는, 그저 기도만 하는, 생각만 하는 그런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말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일 또한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로 이어져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책을 읽고 난 후의 가히 혁명과도 같은 놀라운 변화라고 일꺠워줍니다.  _p.160

식민지 청년이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행하는 일이란 말입니까.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걸 '알긴 알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혹은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는 것이 될는지, 아니면 자신의 공부로부터 앎을 구하고 그 앎으로부터 조선과 자기 삶을 이끌 실천을 행하는 것이 될는지요. 그래서 '하는 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었나 봅니다. 그 어려움을 행하라고, 아들에게 말하는 어미였습니다.  _p.162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 회사에 있는 비품을 깨버린 적이 있었다. 새내기 직원이었으니 혼날 걱정에 물어내야 할 걱정에 온통 걱정 투성이였다. 그때 상사였던 분이 "일을 하니까 깨뜨리고 망가지고 하는 거야. 괜찮아." 라고 이야기해주셨다. 20년 가까이 지났고, 사실 그 분이 누구였는지도 가물거리지만 그 말은 계속 기억에 남는다. 일을 안하면 망가지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는다. 식민지에서 공부를 해도 독립운동은 안해도 그만이지 않았을까? 괜히 독립운동한다고 해봐야 목숨만 위태로워지지 않았을까? 안 하는 건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인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생명을 함께 내어 놓고 나가야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행함을, 독립을 위한 운동으로 행함을 독려하는 어미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드시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토지 4권 316쪽)

"가령 말하자면 우리가 어둠이 있기 때문에 밝음을 인식하거든요. 세상이 밤낮 어둡기만 하면 밝은 것을 인식 못하잖아요. 또 밝음 속에 항상 있다면 어둠을 모르죠." 이는 [토지] 전체, 아니 선생의 삶 전체를 꿰뚫는 생각인 듯합니다. 선생은 또, 어둠과 밝음의 그 관계처럼 행과 불행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_p.165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무니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 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성싶지 않았다. 분명 환난을 겪는 욥에게는 행복의 비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토지] 제1부를 쓰던 3년 동안의 내 심경이며 그것을 적어본 것이다."  _p.166

욥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았는데, 재앙은 어찌 거절하냐"라고 그랬다는군요. 체념이 아닌 의지와 확신을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_p.168


40년을 살아온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나의 인생은 행이였을까 불행이었을까 싶다. 박경리 선생에게 그러했듯 나에게도 누군가는 행이라 하고, 누군가는 불행이라 할 수 있겠지. 그중 누가 나를 더 잘 알고 이야기하는 걸까? 사실 나도 나의 생이 행인지 불행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날씨가 그러하듯 나의 삶도 행이 오고, 불행이 오고, 다시 행이 오고를 반복하며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욥이 그러하듯 중심을 잡고 나아갈 필요하 있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물음, 진실에 대한 물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끝이 없게 그 물음에 매달리는데 '모른다'라는 그 말만 확실한 것이죠."   (박경리 대담 중)

질문이란 무엇인가. 그 시작은 아마도 '지금 여기'를 다르게 보는 것으로부터 찾아질 겁니다. 내게 익숙해진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것'을 생각하기, 그로부터 질문이 일어나는 것일 터이니까요. ~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알아가고, 스스로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질문한다는 일입니다. ~ "문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고 '왜'라는 질문 그 자체가 문학을 지속적으로 지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 순수하되 근본적인 이 질문의 힘을 한평생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 박경리 선생은 그래서 한평생 '모른다', 그러니 '묻는다', 그런 마음을 품고 지냈나 봅니다. ~ 나는 무엇과 마주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찾아 나설 것인가,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_p.188~189


모른다. 그러니 묻는다.

오래도록 간직할 글이다. 내가 모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는 "왜"를 생각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상황을 더 깊이 생각하고 파고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엄마가 어떻게 알아?"라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엄마는 다 알아"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물론 대드는 아이에 대한 홧김에 나오는 소리일 뿐이다. 엄마라고 어찌 다 알겠으며, 지극히 모자란 내가 무엇을 알고 있을까? 아이 앞에서도 모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겠다. 


"뭐니 뭐니 혀도 배고픈 정 아는 그게 사람으로서는 제일로 가는 정인디..."  (토지 6권 33쪽)

세상에 밥 먹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밥을 내게 처음으로 먹여주는 사람이 바로 부모입니다. ~ 실로 부모라는 존재는 주갑이의 말처럼 "주린 배 채우주는" 사람인가 봅니다. ~ 엄마, 밥, 부모는 언제 어디서나 이 말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_p.210~211


엄마와 통화를 할 떄면 빠지지 않는 질문이 "밥은?"이다. 밥 때이건, 아니건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밥을 먹고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결혼하고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가 내가 원하는 때 밥을 먹을 수 있고,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된다는 점이었다. 하루 종일 밥은 안 먹고, 과자 몇 봉지로 지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삶이 주는 자유가 꿀 같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보니, 아이가 하루 한 끼라도 먹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난 듯 잔소리를 하게 된다. 주전부리로 배가 가득 찬 아이에게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며 밥상을 차리고 숟가락을 쥐어준다. 그건 굶음에 대한 걱정이라기 보다는 작가가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제일 가는 정, 그것도 "모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미 뫼 문지듯이, 일이란 그렇기 혀야제잉. 세월이란 것도 개미 뫼 문지듯 가는 거 아니더라고?"  (토지 14권 97쪽)

박영석 대장이 어떤 최고이든 어떤 최초이든 간에 그와 별개로 '발 앞만 보고' 간다는 그 말에 눈이 번적 떠졌습니다. ~ 하루하루와 매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개미들이 만드는 위대함 말입니다.  _p.220

"예로부터 누운~처럼 게으른 게 읎꼬오~ 손처럼 부지런한 게 읎따아~"라고 읊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대로였습니다. 분명 산더미처럼 쌓인 콩나물이었느너데도, 하나하나 다듬는 지루한 손놀인데도 시나브로 일은 끝나갔습니다. ~ 게으른 눈 대신 부지런한 손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콩나물 한 가닥 집어 들듯, 멸치 한 마리 가르듯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_p.222

하루하루 아니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그 '하나'를 알려준 것입니다. 하나하나 옮겨놓는 모래알로부터 내 삶이 쌓이고, 차고차곡 쌓인 모래알들이 높은 산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_p.223


얼마전 지인이 장마 때문에 급히 수확한 무공해 깻잎을 주었다. 커다란 검은 봉지에 가득 넣어 주었는데, 꺼내어 보니 넉넉히 봉지 3개에도 들어갔을 양의 깻잎이 들어있었다. 싱크대에 모두 올려두고 한장 한장 씻으며 이걸 언제 다 씻나라는 마음에 한 숨을 내쉴 때, 이 구절이 생각났다. 깻잎 한 장 집어들듯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야겠다라고. 그 수북하던 깻잎이 모두 씻겨져 소쿠리에 담겨질 그 날은 반드시 올테니 말이다.


"어쩌면 그 사람 운명 앞에 큰 대자로 누워버린 사람 아닐까요? 아주 편안하게요. 해서 자유롭게 거동하며 복종도 반항도 아닌 생각한 대로 구름 가듯이."  (토지 16권 287쪽)

박경리 선생이 "사람 하나하나의 운명, 그리고 그 사람의 현실과의 대결을 통해 역사가 투영"된다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_p.229

어쩌면 그때 그 여학생들이 지금 어딘가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선선히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결코 가볍지는 않을 삶의 무게를 지고 있겠지만, 내 친구 그녀들은 그때처럼 제 걸음을 내디디고 있을 겁니다. 힘겹게, 그러나 결코 매여 살지 않았던 이 땅의 많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살기를 싫어하는 자유인이며 방랑자요 자기 존엄을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담함"으로 "운명 앞에 큰 대자로 누워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_p.230~231


자신의 운명을 선선히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무탈하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힘겹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언제나 밝아보이는 친구가 그랬다. 그의 남편이 몇 해전 대장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하고, 겨우 이겨냈다 싶었을 때, 다시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또 다른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친구와 앉아서 조용히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도 친구 남편도 겉으로는 전혀 그러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시련과 절망이 있었고, 또 얼마나 많은 아픔과 견딤이 있었을까. 그들이 담대하게 짊어지고 견디며, 이겨낸 시간들. 운명 앞에서의 대담함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  (토지 6권 81쪽)

학력이 우선되고, 이익이 우선되는 과정에서 김군과 '알지 못하는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람입니다. ~ 대형 마트의 무빙워크를 수리하던 청년이 숨진 바로 그 장소에, 쇼핑에 불편에 끼쳐 죄송하다는 "참담한, 자본의 애도"만이 내걸립니다. 그것은 사람의 죽음보다 쇼핑하는 사람 아니 쇼핑으로 생기는 이익만을 보는 참담함입니다. ~ '인건비'와 '물건비'는 털끝만금의 차이도 없는 '지출경비'로 계산됩니다. ~ 노동자가, 사람이 '비용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 그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구의역 김군'과 '내가 알지 못하는 아이'와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를 덮치는 공포입니다.  _p.247

우리 곁에 있는 사람과 우리 뒤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잘못된 것은 우리들,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_p.248


매일의 뉴스를 장식하는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를 박경리 선생은 이미 알고 계셨나 보다. 사람이 부속품이 되어가고, 사람이 노리개가 되어가고,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귀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얼마전 큰 비에 강가의 구조물이 쓸려내려간 적이 있다. 비싸고 귀한 그 구조물을 지키기 위해 나셨던 사람 중 몇 명의 배가 전복되었고, 몇 명의 목숨이 함께 사라졌다. 비싸고 귀한 구조물이 그보다 훨씬 귀한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과연 그 구조물이 생명을 걸고 지켜야 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겠지만, 이미 생명의 값은 치뤄졌다.


"머릿속에 도판을 그리기보다 땅을 먼저 밟아야 하네."  (토지 18권 436쪽)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리는 노인 목수의 그림을 보고, 선생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 생각을 키워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라고 말이지요.  _p.252

[담론]에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배움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까지 여행"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땅을 먼저 밟아야 한다"라는 해도사의 말이 바로 그러한 여행이다 싶습니다. 머릿속 생각과 실제가 다르고, 지식과 실천의 간극이 있음을 직시한다면, 해도사의 말처럼 도판을 그리는 것보다 땅을 먼저 밟아야 하니까요.  _p.254

제 공부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이는 [토지]와 박경리 선생의 말을 공부하는 만큼 그렇게 살아가고, 멀리는 제가 하는 모든 공부로부터 배운 만큼 그만큼 '다르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머릿속 도판을 그리는 공부가 아니라, 땅을 밟는 공부, 머리와 가슴과 발을 잇는 그런 공부여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런 공부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것일 것입니다. 실제로 내 삶에 쓰이는 공부이고, 공부한 대로 살아가니까 말입니다.  _p.257


"모른다고 인정하고, 모르니 알기 위해 왜라고 묻고, 물어서 깨달은 바로 다르게 살아가기" 

박경리 선생의 말과 저자의 글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나태해 지지 않고, 나를 더 성장시켜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시작한 모든 일들 속에서 배우고, 깨닫는 것이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머리로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고, 발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을 끝낼 때까지 지속될 나의 삶의 여정은 그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르치는 사람, 배움의 장에서 말하는 자는 앎과 진리에 대해 '공적으로 고백하는 사람', 자신이 말한 대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실천'은 심지어 참여와 책임을 전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임햇던 '신앙고백'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 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하는 것. 그러한 사람이 바로 '말이 아닌 몸으로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_p.272~273

문학은 선생에게 무엇입니까. "인생 자체가 문학이에요. 문학을 내 인생과 갈라놓지 않아요. 문학이 제 인생이고 제 인생이 문학이고..."라 합니다. _p.275

저는 그랬습니다. 참 어정쩡했습니다.  _p.278

박경리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내부,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의 대결"을 멈추지 않는 것이 '글 쓰는 나'였던 것입니다. 글 쓰는 나, 멈춰 서 있지 않기 위해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글을 씁니다. 나와 세계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기 위해서 글을 씁니다.  _p.282


책을 덮으며 박경리 선생의 대작 [토지]에 대한 경의를 다시 한 번 표할 수 밖에 없다. 몇십년을 매달려 완성한 박경리 선생의 머릿속이 마음속이 얼마나 다사다난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성격이 급해서 휘리릭 처리해 버리는 나에게는 몇 십년을 한 작품에 매진하는 박경리 선생의 모습이 다른 차원의 사람과도 같이 여겨진다. 또한 박경리 선생의 말을 씨앗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김연숙 작가의 글도 역시나 존경스럽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려면 두루두루 많이 알고, 깊이 생각하고, 저자의 말처럼 아니 저자가 인용한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자신의 내부,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의 대결"을 멈추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새삼 깨닫는다. 이 분들 앞에서 감히 작가를 꿈꾸고 있다 말하기 위해서 앞으로 날들이 앎의 깊이, 삶의 깊이, 마음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가야겠다 다짐한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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