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나의 하나뿐인 혈육이 자살을 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면 그순간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뭐지?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믿음이 가질 않을 것이다. 머리에 총 맞은 기분인 채로 아마도 시체를 확인하러 가겠지. 갔는데 진짜였을 때의 나의 행동은??
어릴 때 눈 앞에서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한동안 자각을 못했다. 말 그대로 멍~ 이게 뭔 상황이지..? 무려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되었는데도 그랬다. 아빠와 동급으로 인식되던 언니가 애처럼 우는 걸 보면서 그제서야 무슨 일이 났구나, 아주 큰 일이 났구나..란 자각이 들었다. 언니의 눈물을 보고서야 눈물이 나왔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나는 온 가족이 다함께였었다. 하지만 지안은..
p.38
나는 그들 곁에서 무릎을 모으고 앉아 소년 정진만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얘, 넌 왜 울지를 않니? 삼촌이랑 사이가 별로였어?"
상용 아저씨가 소주와 맥주를 섞어 한입에 털어 놓은 뒤 물었다. 조문객들의 시선이 일순 내게로 향했다.
"그러네. 혈육이라곤 진만이밖에 없잖아."
그의 아내가 진미채를 질겅이며 거들었다.
"괘씸…… 하잖아요."
그들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총각이 애면글면 돈을 벌어 먹이고 입혀 키워낸 조카가 말간 얼굴로 괘씸이란 단어를 혀 위에 올렸으니 어련할까 싶었다. 하지만 삼촌이 괘씸한 건 사실이었다. 내게 한마디 예고도 없이 자기 멋대로 죽어버린 그가 좀처럼 용서되지 않았다. 남들에겐 정의롭게 인심 좋은 친구였을지 몰라도, 내게 그는 무책임하고 의리 없는 아버지의 형제로 기억될 것이었다.
살갑지는 않았어도 꽤 나쁘지는 않았던 지만과 지안의 사이라면.. 지안의 저 반응이 이상하지 않았다. 되려 나는 정상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는 겉이 아닌 책 안으로 그들을 지켜봤으니까.. 하지만 멀찍이서 겉으로만 본 사람들은 지안이를 좀 이상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니.까.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만사 OK 다 통과되는 것은 아니다.
p.53
'ADMIN : 죄송합니다, 고객님. 정진만 사장님은 이틀 전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쇼핑몰 운영은 오늘부터 중단되오니 입금하신 금액도 환불 처리 해드리겠습니다."
삼촌의 예금을 상속받으려면 사망신고부터 해야 했다. 무명씨가 부디 너그러운 사람이길 기대했다.
'GUEST 1 : 그래서 너는 누구냐고?'
진상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ADMIN : 저는 고인의 가족입니다. 다시 한번 양해 부탁드립니다.'
'GUEST 1 : 진만이가 죽었다니 말도 안 돼. 그럼 너도 오늘 안에 죽겠네?'
무명씨의 메세지는 그걸로 끝이 났다. 눈물로 젖은 얼굴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두근대고 속이 더부룩했다. 악의적인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불쾌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삼촌이 죽은 것도 미처 마음 속에서 수습이 안 되었는데, 언 미친 놈이 저렇게 글을 남긴다면..? 지안이처럼 가족이 아닌데도 내가 이렇게 화가 부글부글 끓는데.. 잘근잘근 씹어뱉어도 속이 시원할 것 같지 않은데.. 아우..ㅡㅡ^
p.109
"이런 대화, 신기하다. 꼭 아빠랑 딸 같잖아. 삼촌이 아빠 같네."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부모님이 살아 있었으면 그들과 주고받았을 대화였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상상하며, 대학과 취업과 적금, 2000㏄ 중고차와 전세보증금에 대한 구체성 없는 희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이 지어놓고 죽은 알집이 너무 두꺼워 나는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정지안, 잘 들어. 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 영원히 될 수 없겠지. 그렇지만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일엔 아빠라고 불러도 좋아. 일종의 롤플레잉을 하는 거지. 형도 살만 좀 쪘으면 나랑 비슷하게 생겼을 거야."
나는 말없이 삼촌을 끌어안았다. 그 후 두 번의 기일이 지나갔지만, 그때마다 알바와 겹쳐 고향에 내려오지 못했다. 그는, 나의 하루뿐인 아빠는 그래도 내 몫의 밥을 했을 거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치 않음을 알면서도, 해보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노무 G랄 맞은 성격 때문에.. 기어이 대학 문턱은 한 번 밟아보겠다고.. 언니 오빠 형부 새언니 엄마 모두 소집해서 가족회의를 했을 때, 그때 처음으로 아빠의 부재를 크게 느꼈다. 아빠가 있었음 이런 가족회의 같은 거 하지도 않았을텐데.. 아빠는 그냥 보내줬을텐데.. 그런 부질 없는 회의감. 진작에나 좀 잘하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음 씁쓸하지나 않았을텐데.. 나는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 밥도 거의 같이 먹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작 아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바로 떠오르는 게 '아빠'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는데.. 그런데도 우리 가족들은 고작 열아홉에 아빠를 잃은 나를 안타깝게 여기며 아빠의 빈자리를 안 느끼게 많이도 노력해줬다. 지안의 삼촌처럼.
p.143
"창문에선 도저히 위치 식별이 안 돼요. 이제 겨우 한 놈이에요. 열다섯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쳐들어오면 집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그게 그거고요. 김준열을 끝장내야 남은 열네 명이 겁이라도 먹죠."
브라더를 설득할 마음은 없었다. 이미 나는 현관 문고리를 돌리는 중이었으니까. 영화 속 민폐 조연처럼 비명이나 지르고 빈방으로 숨어들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특히 공포나 스릴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 중 하나가 어딜가든 저런 민폐들이 꼭 있다~였는데. ㅎ 지안은 다행히도 아니였다. 멋지다~ 싶으면서도 좀 무모하다~ 싶기도 한.. 하지만 지안의 말마따나 집 안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고 해결될 노릇이 아니면 뭐라도 해봐야 죽을 때 죽더라도 아쉽지는 않을 것 같은.. 무모한 마음이 나도 좀 있다. 물론,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지는 하늘도 땅도 나도 모를 일이지만..^;;;
짧은 영화 한 편 보는 기분이었다. 한 30분이나 한 시간 정도의 액션드라마. 지안의 심리 변화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액션적인 전재가 꽤나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뒤통수 한 방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 단, 재밌는 액션 영화를 무성으로 보는 기분이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효과음이 들렸으면 완전 실감났겠다~하는 조금 허황된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Good!^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