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8
매실청을 담글 때 사용하는 설탕은 180일이 지나면 숙성 중에 분해돼 과당과 포도당이 되고, 일부는 유기산으로 발효된다고 한다. 또 청매실에는 '아미그달린'이라는 자연 독이 존재하긴 하지만 6개월 이상 설탕을 재우면 없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설탕과 매실은 서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사이인 것이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관계의 이상적 형태가 아닌가. 오, 매실과 설탕의 끈적한 사랑을 응원해! 나의 아이도 누군가와 만나 선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독'이랄 수 있는 면을 갖기 마련. 그 독을 없애줄 수 있는 설탕 같은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물론 그 전제는 일정 기간 이상의 숙성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거겠지.
나도 누군가와 만나 선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p.160
이번 여름은 파도에 매료되었어.
파도 앞에서 파도의 일을 생각해보았어.
이토록 하염이 없는 일.
이토록 부서지는 일.
일어서고 달려오고 부딪치고 부서지고 스러지고 다시 끌려가고.
파도는 다시 어디서부터 파도일까.
일어서고 달려오고 부딪치고 부서지고 스러지고 다시 끌려가도.. 또 다시 일어서고... 파도가 꼭 사람의 인생 같다. 이토록 하염이 없고, 이토록 부서지는 삶..
p.217
"그러니까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한 거야. 특히 나쁜 일은 마음속 깊은 곳에다 묻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리면 그 나쁜 경험도 나중에 좋은 걸로 바뀔 수 있어. 상수리나무처럼."
오랫동안 안 입었던 옷에서 꾸깃꾸깃 돈이 나왔을 때.. 그때는 분명 돈을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상심했을 테지만.. 다시 찾았을 때는 행운이고 행복일 테지..^ㅎ
p.246
"면맛에 이모는 진짜 자상해. 면맛에 이모랑 삼촌은 어떻게 그렇게 국수 요리를 잘할까?"
어떻게.. 여덟 살이 이렇게 말을 이쁘게 잘해.. 어쩜 이렇게 표현을 잘할까..?^ㅎ
p.251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해녀들의 물질과는 다르지 않지요.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검푸른 바다로 자맥질해 들어가야 하는 일.
그 심연에서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는 일.
제 몫의 생활을 꾸려간다는 건 그런 것일 테니까요.
(…)
다시 검푸른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들이는
한 모금의 숨, 한 호흡의 노래.
우리에게도 그것이 절실합니다.
숨비소리란 그저 잠깐의 휴식이나 숨 고르기 정도가 아닌
목숨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삶은,
질식해버리고 말 테니까요.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중
잠깐의 그 한 모금의 숨.. 조금 크게 내쉬는 그 숨이.. 죽을 것 같던 어떤 날에 작은 숨통이 되어 나를 살게 해준다.
p.269
어느 날엔가는
"너무 슬퍼서 주먹도 쥐어지지 않아."
무슨 슬픈 꿈을 꾸며 울다 깨어난 아침이었다.
"엄마, 나 좀 간질여줘."
"왜? 너 간지러운 거 못 참잖아."
"좀 웃게."
그래, 억지로 간질여서라도 웃자. 웃다 보면 나아진다. 근데 자기는 자기를 간질일 수 없으니 억지로 간질여줄 한 사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봐도.. 이 아이는 여덟 살이 아닌 것 같다..^;;
p.276
수전 손택의 말처럼 슈트(shoot)라는 단어는 총을 '쏘다'와 사진을 '찍다'라는 뜻을 함께 지닌다. 카메라의 긴 렌즈와 총부리가 닮았다. 사진을 찍느라 생명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쏜 것이 된다. 셔터 소리는 총소리가 된다. 현민이네 강아지는 내 앞에서 죽어갔다. 내 어깨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p.290
삶에도 그런 지점들이 찾아온다. 인생의 활주로에서 무언가를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 일. 멈추거나 머뭇거리기보단, 날아오르는 것이 최선인 순간들. 때론 그게 누군가를 향해서일 때도 있을 것이다. 상처 받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마음의 속도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 비상착륙을 할지, 계속 비행을 할지는 일단 이륙을 한 다음에 판단할 것.
좀 오래 전에 제목에 이끌려 사두었다가 책장에서 한참 있었던 이 책을 2023년 첫 책으로 읽기로 했다. 매년 다짐하는 '집에 있는 책 먼저 읽기'를 이 책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꺼내들 때만 해도 이렇게 후다다닥 읽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었는데..ㅎ 요즘은 정말 책이 잘 안 읽혔었는데.. 새해 첫 책은 내 희망처럼 잘 읽혔다.
여덟 살 아이와 제주살이를 시작한 시인 엄마의.. 딸에게 쓰는 편지와 같은 일기다. 여덟 살 딸은 어떻게.. 읽혔을까.. 읽기는 했을까 싶은데.. 마흔셋이 되는 딸은.. 이 편지 같은 일기가 너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좋다!'라는 단어 외에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읽으면서 내내 내가 여덟 살의 딸이였다면, 내가 여덟 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면.. 이런 가정을 계속 하게 되었다. 이 아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영민했다. 엄마는 그런 아이의 엄마답게 지혜로웠다. 그리고 제주는 참.. 매혹적이었다. 살면서 제주를 두 번 다녀왔었지만, 여행과 살이는 또 다른 것이여서.. 두 모녀의 잘 어우진 제주살이가 참 보기 좋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저렇게 살풍경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작가님이 사시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제주도의 수산리에서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살아봤으면 하는 소망을 올해 처음으로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