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그저 점심 메뉴는 무엇으로 정하느냐 혹은 어떤 색의 옷을 사느냐와 같은 그저 일상의 일들을 결정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쉽게 하던 말이 있었다. “아우, 나는 결정장애가 있나봐.” 단순히 결정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쓰인 이 말이 사실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김지혜 작가는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6]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우리는 단어에 의미를 붙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관념을 사용해 왔다. 그저 '나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써왔지만 사실은 나 자신보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이런 일이 단어와 같은 말에만 국한된 일일까. 우리의 세상 자체가 비장애인의 기준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장애인들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치부하고 살아오고 있었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가 다 같은 하나의 생명이고 인간임을 때로는 잊기도 한다.
백순심 작가는 그녀의 두번째 책『불편하게 사는 게 당연하진 않습니다』에서 정상 비정상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기준이 바뀌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 이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수많은 규칙과 사고 방식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차별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인데 그 '모두'는 진정한 '모두'가 아닌 세상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경사로나 엘레베이터, 횡단보도에서 들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알림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보도 블럭 등등. 예전보다 나아진 환경을 보며 장애인들이 전보다는 조금은 편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전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가 장애인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다면 잘못이다. ‘왜 처음부터 장애인을 고려한 편의시설을 반영하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게 정확하다. 예산 낭비라고 장애인에게 따져 묻기보다는 비장애인의 기준으로 설계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게 옳다. 교통 정책은 애초에 장애인이 사용할 거라는 가정하에 세웠어야 하는 부분이다. 51]
아, 그렇구나. '왜 바꾸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장애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도 사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식이 달라졌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안다. 다만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근본적인 것부터 바꾸려는 마음 또한 중요함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눈이 세개인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눈이 두개인 사람들이 비정상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이 사는 것일 뿐 그것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과연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상(正常)
1.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 (네이버 국어 사전)
과연 정상이라는 이 단어가 사람에게 써도 되는 단어인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