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시집 서평 중에서-
시집을 읽으면서, 위의 서평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시집 '양파 공동체'가 보여주는 시적 사유와 정서의 세계의 지평이 좁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 시집이 단순히 우리가 모르는 우주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시인의 언어에 언뜻 무책임함과 예술 본연의 '막연한 정서'에서 그침을 증명하듯 보이기 때문이다. '양파공동체'는 '컵'을 두고 말하는 대상과의 회화이며, '플래니모'로부터 온 답장이며, 식물적 언어 혹은 세계의 어떤 '고백'이다. 즉 위 시집은 단순히 '보여주는' 시집이 아니며, 필시 어떤 '초대장'이다.
시인은 자신만의 우주를 증명하고 안내해주려 한다. 다시말해 '초대'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 있는 '이상하게 있음'(권혁웅)의 형태로 양파 공동체는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목 없는 의자에 앉아'(본문 '굿' 중) 그 세계를 즐길 수 있다.
시인은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이라고 하고, 또한 '세계를 뒤집어 보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양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확한 정의는 아니다. 양파는 뒤집어도 양파이지만, 같은 것이듯. 시인은 세상을 무리하게 뒤집으려고도,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의 기록과 상처와 그를 통한 몽상을 하나의 길로 이어 '자신만의 각도'를 창조한다. 그리고 세상을 '이상하게' 본다. 이상하다는 것은 삐딱하게도, 뒤집어서도 보는 게 아니라, 다만 '신비로운' 것인데, 우리는 이 반물질적 이상함 속에서 '즐겁게 헤매다' 보면 홀연히 느끼게 될 것이다. 바른 세계를 우리가 이상하게 보는지, 이상한 세계를 오히려 (우리의 몽환적 자아의 눈에서) 똑바로 보고 있는지를.
결국 '우리는 무덤 속'에서 만난다. 그것은 똑바르고 고독한 세계의 '무덤 속'이고(자서), 외롭고 아름답고 이상한 시의 세계일 것이다.
시인은 어떤 철학적 사유나 수심이 깊은 곳에서 끌어낼 난해한 이지적 성찰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찌보면 '반물질적' 세계에선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시인은 그것을 '체스판'이나 '달력'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무의미한 세계, 죽음 이후와 닮아있는, 그러나 살아있는 그 세계를.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양수의 세계를 살아오기에 바빳고, 그러기에 슬펐음을 안다. 시집을 읽으면서 작자와 적절한 소통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파'를 통해 양수의 '이 세계'에 저 세계의 '음수'가 흘러들고 있음을 느낀다.
저 외계로부터 온 편지같은 시집이다.(플래니모의 답장)
외롭고, 따뜻하고, '이상한'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