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영화 '트롤의 습격'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모든 동화에는 진실이 섞여 있는 거 알지?"
모든 동화 뿐만 아니라 모든 신화, 모든 이야기에는 진실이 섞여 있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들은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마법과 요정, 괴물들과 영웅들, 오히려 그러한 면 때문에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어떤 진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감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 '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는 그 감춰진 진실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보물찾기다.
첫 번째 이야기 '제우스는 왜 바람둥이일까'는 나 역시 전부터 불편한 부분이었다. 그리스신화에서 최고신 제우스는 다른 여성을 임신시켜서 신들을 만들고 이야기를 확장한다. 나쁘게 말하면, 그리스신화는 막장 드라마고, 제우스는 납치 간간범이다. 그런데, 미투 운동으로 제우스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면 억울할 수 있음을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제우스는 이용당한 것이다. 그리스인들(프로메테우스의 손자인 헬렌을 시조로 모신 헬레네민족)은 여러 지역을 정복하면서 그 지역의 신들을 흡수하는 방식을 제우스와의 결합으로 정당화했던 것이다. 정복당한 쪽에서는 일종의 역사왜곡? 아니 신화왜곡이었을까?
그리스에서 시작한 유럽문명의 근원은 크레타에, 크레타 문명의 근원은 오리엔트에 있다고. 그래서 바람둥이 제우스는 소로 변신해서까지 페니키아 인간 여성을 납치해야 했다. (21쪽)
제우스가 납치한 페니키아 공주 에로우페Europe는 유럽문명의 어머니가 되었단다. 시작부터 좀 쎄하다. 참고로 이 책은 유럽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 한 권으로 그리스신화부터 중세, 대항해시대, 산업혁명, 세계대전, 근대화까지 유럽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동화는 재밌고 흥미로울 수 있어도 그 뒤에 감춰진 진실은 불편하고 어두울 수 있으니까. 전작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를 읽은 독자들은 알겠지만, 이 책 역시 동화와 문학 속에 담긴 환상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려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파괴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볼 준비가 된 독자라면 흥미진진한 책일 것이다.
기원전 800년에 시작한 로마는 200년경 최대 영토가 된다.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가 되었고 라인강과 도나우강까지 이른다. 그런데 로마는 경계선을 중요하게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 때 만든 선들 중에 유명한 것이 게르마니쿠스 방벽과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다. 로마는 왜 그렇게 선에 집착했을까? 선 안쪽은 우리 편, 문명인이 살고 바깥쪽은 적, 괴물, 야만인이 산다는 편견은 지금도 유지되는 것 같다. 현재 유럽은 로마의 후예이고, 대항해시대에도 선긋기는 확실했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로마 제국은 멸망한다(476년). 중세의 시작이자, 선 안의 문명(로마)과 선 밖의 문명(게르만)의 융합의 시작이다. 북쪽 유럽은 곡식을 주식으로 하기에는 어려운 기후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주로 돼지를 먹었다고 한다. 돼지들을 숲으로 몰고 가 도토리를 먹였다고 한다. 신기하다. 돼지가 도토리를 먹다니. 소세지와 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나보다.
유럽 왕실이나 귀족들의 문장을 보면 사자가 많이 보인다. 힘과 권위의 상징인데,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것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사자는 십자군전쟁 때 유럽인들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그렇게 유럽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부모가 아닌) 산타클로스가 주는 이유는 충격이 컸다. 자식들의 가출을 막기 위한 대안이 산타클로스였다니? 중세 유럽의 도제 풍습으로 이어진다는 게 신기하다.
한편, 800년 크리스마스, 교황 레오 3세는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왕국의) 카룰루스대제에게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치러준다. 이 사건은 로마가 4세기에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삼은 이후, 새로운 서로마제국의 시작이다(서로마제국에서 분열된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까지 이어진다).
로마의 선긋기는 유일신인 크리스트교와 궁합이 맞았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선 밖의 적, 괴물, 악마가 필요했을 것이다. 선 밖의 것들은 곰과 마녀였다. 그래서 마녀는 선 밖인 숲 속에 살 수 밖에 없었고, 곰들은 포교의 명분으로 사냥당했다.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브루주아들의 출현은 유럽 대중들에게 '자유'를 맛보게 한다. 그렇게 중세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 무렵, 계급의 충돌은 종교혁명과 대항해시대로 넘어간다.
작가는 '오셀로'를 통해 15~16세기 해양 패권이 이동하는 대항해시대의 역사(베네치아->포르투갈과 에스파냐->잉글랜드)뿐 아니라, 오셀로가 왜 무어인 남자여야 했는지 그 이유와, 오셀로가 죽인 아내의 아버지의 말에서 여성 혐오까지 찾아낸다. 또한 '제인 에어'에서 중요한 역할이 아닌 로체스터의 부인 버사 메이슨을 주목한다. 버사는 영국 식민지인 서인도제도 자메이카의 농장주 딸이었다. 결국, 식민지에서 태어난 버사는 영국 출신인 제인 에어의 행복을 위해 희생된 꼴이었다. 아, 중학생 때 읽은 명작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잉글랜드의 활약(?)이 돋보인다. 강국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서인도제도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해군이 해적으로 활동하도록 허용했다는 건 그 이후 잉글랜드, 즉 영국의 번영 뒤에 감춰진 여러 악행들 중 하나일 것이다.
영국에서 철도 미스테리 소설이 많은 이유를 마주보는 폐쇄적인 객실이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관련되어 문고판의 인기와 철도시는 정말 신선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남북전쟁을 일으켰다구? 당시 미국 남부와 북부의 상황을 비교하며 이 책이 일으킨 충격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노예 탈출을 돕는 지하철도 조직 포함).
'쾌걸 조로'를 통해, 캘리포니아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맥시코의 영토였음을 알 게 되었다.
영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미친 티파티'가 끝나갈 즈음,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말의 수난사의 끝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전쟁을 비롯한 모든 사회구조적 폭력은 이렇게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다른 존재로 규정하여 차별하는 데서 시작된다. (350쪽)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책이다. 전작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내용은 더 깊었다. 엄청난 참고 문헌 목록을 봤다. 디테일이 대단하다. 주목받지 않았던 아웃사이더들과 사소한 부분을 파고들어서 역사와 연결시키는 능력은 대단하다. 마치 탐정같다.
역시, 그동안의 환상이 깨졌다. 전에는 그게 불편했다. 난 아름답고 멋진 것만 기억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환상들이 조금씩 깨지고 파괴되면서 그 덕에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시야가 넓어진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고 싶다.
이 책의 서문 제목이 마음에 든다.
'다른 이야기를 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문 끝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세상에는 권력을 가진 쪽이 기록한 역사 외에 다른 역사도 늘 있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가 이렇게 짜인 것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당연한 결과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른 이야기를 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위의 문장을 읽으면 왜 역사 그 너머를 봐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이야기를 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으니까. 감춰진 다른 이야기 속에 진실이 더 많이 섞여있을 것이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덜 차별받을 것이고 폭력에 덜 시달릴 것이다. 강자들의 선긋기에 덜 희생당할 것이다. 결국, 더 자유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고 알려진 부분과 눈에 잘 안보이고 감춰진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의식과 무의식처럼. 영화 '트롤의 습격'에서 아버지는 딸에게 또 이런 얘기를 한다.
"'눈에 보여야 믿는다' 그렇게들 말하지? 실은 그 반대야. 믿어야 비로소 보이지. 볼 수 있겠니, 노라야?"
이 책은 감춰진 역사들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만약 이 진실을 잊고 산다면 그건 이 세상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사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진실을 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힘들다. 그런데 이 책은 잘 알려진 동화와 명작을 통해 나름 재밌게 그 진실을 눈 앞에 보여준다. 작가가 차려준 밥상을 수저를 들고 먹으면 된다. 그런데 그 밥상이 마냥 맛있지는 않다. 씁쓸하고 시큼한 진실을 삼켜야 할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다. 그럼 이 책은 쓴 책인가? 하여튼, 이 책을 잘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다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임을 분명하다.
알려지지 않은 다른 역사, 다른 과거가 존재했다는 진실을 믿는다면 노라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가 달리지면 당연히 현재도 달라진다. 전과 같은 세상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