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구 중 가장 폐쇄적인 곳을 꼽으라면 아마 법원이나 검찰과 같은 사법기관이 아닐까 싶다. 보통사람들은 살면서 그곳에 출입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궁금증을 느낀다. 권력기관이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간혹 들려오는 소문과 단편적인 사실은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지만 그렇다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그곳의 구성원인 판사나 검사가 책을 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우리는 그곳을 살짝 엿보기도 한다. 이 책 [어떤 양형 이유]는 현직 판사가 쓴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법원에서 일어나는 일, 판사들이 하는 일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양형 이유’란 형사판결문에서 형벌의 양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곳이다. 판결문이 모든 감상을 배제하고 의미 있는 사실만을 추출하여 일정한 법률효과를 부여하는 글이라면, ‘양형 이유’는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한다. 7년을 변호사로 일하다 법원으로 온 재야출신 판사인 저자는 당사자나 사회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양형 이유를 공들여 적었다며 이 책에 그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책 제목과 같이 자신이 맡았던 일부 형사사건들의 양형 이유를 소개하고, 2장과 3장은 가정법원에 근무하면서 맡았던 재판과 자신이 느낀 우리나라 법원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먼저 1장에서 소개되는 양형 이유는 가정폭력 사건, 성추행 사건, 산업재해 사건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형사사건에 집중된다. ‘가정이라도 폭력이 난무한다면 공적영역이다’, ‘타인의 몸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타인뿐이다’, ‘생명은 계량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함에 있다’와 같은 저자의 양형 이유를 읽으면서 당사자는 이런 판결을 어떻게 들을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판결문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물론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찾아서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판결문이 재판당사자와 상급심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당사자가 아닌 일반인은 알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양형 이유를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하고 연대할 때 비로소 작은 진전이나마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사법부 구성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2장과 3장은 저자가 가정법원에 근무하면서 다룬 소년부 재판, 협의이혼 재판, 소액 재판, 즉결심판 등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재판 하나하나를 읽다 보면 2장의 제목 마냥 온통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또 교정시설이나 방법, 법관 1인당 사건 수, 사법부의 신뢰와 같이 우리나라 사법부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사법부의 독립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체 예산편성권을 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한편으로는 사법부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권력이나 부의 유무에 따라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법원의 판결을 오해하기도 하지만, 피고가 누구냐에 따라 차별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판사들의 일상을, 생각을 엿보게 된다. 오래전에 들었던 경판, 흑판, 백판, 향판과 같은 말에 덧붙여 승무판(승진과 무관한 판사), 승포판(승진을 포기한 판사),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이란 말을 접하면서는 판사 또한 직업인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나돈다는 것은 그만큼 승진과 출세에 목을 매는 사람 또한 많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들이 과연 국민이 바라는 정의를 위해 소신껏 일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판사들 역시 사회지도층이고 기득권층이다. 물론 누군가는 승진과 출세에 관계없이 묵묵히 법으로 말하는 자신의 소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도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저자와 같은 판사가 있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법원에 대한 희망을 읽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냉소하게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