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894년에 일어난 농민들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인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 혁명의 디딤돌이 된 동학에 대한 앎은 단편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아마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는 동학보다는 갑오농민전쟁의 성격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동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대로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경전으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저술했으며, 해월 최시형의 포교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래서 수운이 지은 그 책, 동학의 경전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었다. 동학의 경전 중 하나인 이 책 [용담유사]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우연이 더해진 결과이다.
수운은 종교대각체험을 한 후 자신의 체험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 하나는 한문으로 쓴 [동경대전]이고 다른 하나는 한글로 쓴 [용담유사]이다. 수운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동경대전]을 저술했음에도 별도로 한글 가사인 4.4조 운율의 [용담유사]를 쓴 것은 그것이 민중의 언어였기 때문이라고 도올 김용옥은 말한다. 그럼에도 [용담유사]가 현대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이유는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이지만 한문 표현이 많아 해설을 요구했고, 20세기를 통해 한글이 많이 변하여 일반인이 그 뜻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글 가사라는 이유로 번역의 대상이 되지 않아 민중의 삶에서 멀어져 갔다는 것이다. 도올은 우리에게 수운의 본뜻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 [용담유사]의 언어를 현재의 우리말로 풀어냈다고 말한다.
[용담유사]의 용담은 경주 인근 수운이 활동하던 지역의 이름이고 유사는 깨우침을 주는 노래라는 뜻이다. 수운은 하느님과의 영적 만남을 통해 무극대도를 얻고 포교를 시작했으나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지 않고는 새로운 개벽의 진리를 선포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그래서 그는 [동경대전]과는 별도로 일반 민중과 교류하기 위하여 자신이 종교체험을 한 1860년 4월 이후부터 체포되기 직전인 1863년 8월까지 총 8편의 한글 가사를 저술했다. 이 책에는 집필된 순서로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권학가>, <몽중노소문답가>, <도덕가>, <흥비가> 등 8편이 원문과 함께 도올의 우리말 풀이가 실려있다. 도올은 [용담유사]에 나오는 한자 표현의 출처와 함께 수운이 이야기하는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병기하면서 해석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길이 갔던 부분은 수운이 처음 동학을 창시했을 때 받았던 음해와 핍박, 그리고 동학으로 새롭게 조직하여 포교하자 모여든 온갖 종교사기꾼들에 대한 묘사였다. 영남 유생들의 시기와 음해, 그리고 조선왕조의 핍박은 수운이 포교하는 새로운 사상에 대한 당시 백성들이 호응이 뜨거워지자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런 와중에 모여든 종교사기꾼들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운의 사상을 멋대로 해석하여 백성들을 현혹하자 수운은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내세워 호가호위하는 者치고 제대로 된 者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다시금 느낀다. 특히 한글 가사를 읽어가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18세기 중엽의 한글 표기법을 보게 된 것이다. 읽다 보면 어떤 단어는 의미를 알 것도 같고, 어떤 단어는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러다 해석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기도 한다. [용담유사]라는 책의 내용이 어떠한지, 그리고 처음 수운이 동학을 창시하게 된 동기와 배경이 무엇인지를 안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