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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도서] 채식주의자

한강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작가: 한강
출판사: 
출판년: 

이 책도 아마 혼자서라면 안 봤을 것 같다. 
대학 때 친구가 한강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꽤 인상깊게 남은 작가이긴 한데, 내가 직접 책을 찾아 읽어본 적은 없던 것 같다.
딱 한 권?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꽃들에게 희망을>만큼 얇은 책 한 권을 봤던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아마 그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책 한 권이 도무지 별 감흥이 없어서 그 다음에는 이 작가 소설을 찾아 읽어볼 마음이 안 들었던 것 같고.
그랬는데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나영이가 빌려줬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시작한 독서 모임에서 첫 번째 책이 이 책인데, 너무너무 이상하고 싫다며 나는 어떤 감상인지 궁금하다고 하며 빌려줬다.
왜 그런 이유로 책을 빌려주는지 지금 생각하면 좀 의아하고, 그 말에 호기심이 생겨 보겠다고 한 나도 좀 이상한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채식주의자를 다 읽었고 의외로 재밌었다.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어딘지 강렬한 것도 같았는데,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 건지 문체가 그런 건지 빈 통 속을 지나는 바람같은 느낌이 드는 글이었다.

채식주의자는, 난 처음엔 단편집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서로 다른 지면에 기고된 세 편의 연작소설을 하나로 묶어 출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연작은 채식주의자랑 몽고반점을 지나 나무불꽃까지 봐야 진짜로 봤다고 할 수 있는 소설 같다.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의 탐미가 뒤섞인 불쾌함과 역겨움은 이제껏 기존 한국 문단의 주류였던 남성 작가들이 써오던, 남자들끼리 서로 물고 핥고 빨아주기 바쁘던 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자기변명으로 가득찬 소설의 향을 진하게 풍겨서 언뜻 실망스러웠지만, 사실 잘 보면 그 사이사이 서늘한 문장들이 숨어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 서늘한 문장들이 어쩌다 얻어걸린 여성성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 긴가민가 하다.
일단 문체와 묘사방식, 시선과 구도가 너무나도 기성 한국 남성 문장가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세월호 추모 소설이랍시고 세월호 희생자의 일인칭 소설에서 '내 작은 젖가슴 같은 자두를 베어물었다. 새콤달콤한 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류의 서술을 했다가, 여고생이라면 절대 자기 몸을 그런 식으로 비유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고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던 글이 떠올랐다.
이 소설에선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방식이 고루하고 타자화된 기존 한국 문학의 기법을 그대로 밟고 있다.
사실 앞 부분을 읽으며 몇 번이나 이게 정말 한강 소설이 맞나? 한강이 여성 작가가 맞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심지어 인터넷에서 한강이 정말 여성작가가 맞는지 내가 혹시 잘못 알고 있었는지 찾아보기까지 했다.
이게 한강 본인의 문체라면, 등단 작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고, (물론 이 소설이 나온 지 수 년이 12년 가량 흘렀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만약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면 정말 천재적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몽고반점을 지날 때 까지는 매우 '역겹다'. 영혜가 참새를 물어뜯어서도 아니고, 식칼로 자해를 해서도 아니다.
채식주의자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과 몽고반점의 화자인 남자들의 자기변명이 점철된 서술과 적나라한 욕망이 무척이나 불편하고 역겨운 것이다.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는 영혜가 정신병이라는 생각을 못 했었다. 다만 현대 예술에 종종 등장하는, 불가해하고 비상식적인 주인공이라고 여겼다.
드문드문 영혜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남편의 압박과 억압이 있었다는 묘사가 보이고, 그 묘사들은 서늘하게 가슴에 파고들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흘러넘겨진다.
여기서 영혜는 정신병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보면 기존 질서와 억압에 항거하는 전사처럼, 그리고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묵묵하고 꼿꼿하게 선 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남편의 서술은, 영혜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철저히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인의 감정, 본인에 대한 연민, 본인이 느끼는 당혹과 본인의 곤란함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갑자기 변한 부인 때문에 자신의 평범한 삶이 깨어졌는지를 서술한다.

몽고반점 또한 영혜의 형부이자 인혜의 남편인 남자의 자기 변명으로 점철된 이야기이다.
일견 보잘것 없는 외모와 소심하고 도덕적인 성격의 자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욕망을 솔직히 털어놓는 동시에 그에 대한 죄책감에 고뇌하는 소박한 예술가처럼 묘사되지만, 이 또한 철저한 자기변명일 뿐이다.
이 몽고반점 파트를 읽으면서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생각났다. 
탐미적인 문체로 자신의 부도덕한 사랑에 대한 끝없는 변명과 기만을 늘어놓는 소화자라는 면에서.
그러면서도 실질적 피해자인 여성이 아닌 가해자인 발화자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는, 화자가 끝없이 자신의 죄책감을 토로하고 자신의 죄악을 적나라하게(보이는 어조로) 고백하는 것으로 극대화된다.
하지만 그 모든 변명과 자기연민, 포장을 벗겨내고 나면 날것의 진실은 단순하다.
험버트는 어린 고아 여자애를 성폭행하며 착취했고, 이 소설의 형부는 정신병을 앓는 처제를 강간했다.


위 두 남자가 저지른 죄는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찾아보면 대부분의 평은 영혜를 주인공으로 여기지만, 내 감상은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 영혜는 철저한 객체이다. 메인 소재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인혜가 아닐까 싶다. 
인혜의 입을 통해 영혜의 남편은 자신이 트리거가 되어 정신병을 앓게 된 부인을 버리고 떠난 남편이 되고, 인혜의 남편은 정신병을 앓는 처제를 강간한 남자가 된다.
이런 남자들의 자기 변명과 자기 연민을 다 깨부수고 까발리는 마지막 단편은 카타르시스마저 준다.
더는 그들의 기만에 속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작가가 이런 마지막 파트에서의 폭로까지 못 기다리고, 혹은 약간의 복선으로 이미 남자들의 치졸하고 비열한 면을 언뜻언뜻 내비쳤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과분한 것을 거부한다고 겸손하게 썼지만, 사실은 그저 나보다 누가 잘났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치졸한 성격의 영혜의 남편, 그래서 부인조차 아무렇지 않고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골랐다는 묘사가 이미 나온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화에 순응하고 부인의 '기'에 눌려 사는 것처럼 묘사되던 인혜의 남편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은 늙었음에도 젊은 육체를 탐하고, 욕망에 저항하는 척 하지만 실은 기회만을 노리고 있으며, 자신의 늙고 추레한 육체가 부끄러워 나서지 못할 뿐이다. 또한 그가 인혜에 대해 묘사하는 것도 영혜의 남편이 영혜에 대해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라는 말은, 어딘지 공허하도 피상적이다.
인혜의 남편도, 영혜의 남편도 자신의 부인들을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자신이 좋을 대로 대상화 해 보고 있었다는 인상을 남기는 대목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자신의 비열함과 비겁함, 치부를 가리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했지만 (겸손떨기, 위선떨기, 다른 사람 추켜세우기, 현실을 직시하는 척 하며 그래도 나는 주제파악이 되는 사람인 척 하기, 남에게 비난받기 전에 죄책감을 토로하며 동정심 유발하기, 도덕적인 척 하기, 피해자인 척 하기 등등) 인혜는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인혜는 남편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량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침착하거나 살아가는 게 자연스럽지도 않았으며 영혜 또한 평범하고 무탈한 삶을 산 여자가 아니었다. 
섬세하고 배려심 많으며 단지 말수가 적고 내향적인, 수도승 같은 성격인 줄 알았던 남편은 사실 자기 프라이드가 세고 무책임하며 무신경한 가장이었고, 평범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포기한 것 같았던 영혜의 남편은 아픈 부인을 버리고 매정하게 가버린 이기적인 남자였다.(심지어 부인이 앓게 된 데에 일종의 책임도 있다)
강압적이지만 그래도 자식을 위하는 것 같던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실은 가정폭력범이었고, 가정은 그렇게 살갑고 단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결국 정신을 놓아버린 동생을 인혜는 계속 돌본다.
남자들의 시선 속에서 어딘지 묘한 귀기가 흐르거나, 불가해하면서도 천진한, 인간을 초월한 자연적 여신의 모습 또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비춰지던 영혜는 인혜의 서술 속에서 정신적으로 병을 앓는 환자가 된다. 
마녀도 성녀도 창녀도 아닌, 병들고 아픈 한 인간.
자신을 탓하기도 하는데, 이는 앞서 나온 남자들의 자기변명과 일맥상통하는 자기탓이 아니라, 과거를 돌이켜보는 회한에 가깝다.
그리고 인혜는 너무나도 지치고 소모되었으며 동생과 남편, 부모와의 연 등 관계에 대한 상실을 겪으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을 찾아내고, 마른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서 불꽃처럼 삶을 버티고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연작이 왜 단편이 아닌 '연작'이라고 불리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이 소설을 다 읽었다고 하려면 반드시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을 넘어 나무 불꽃까지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세 편의 순서는 뒤섞여서도 안 된다.
나무 불꽃까지 보고 나면 어딘지 공허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동시에 겨울 하늘 아래 헐벗은 채로도 꿋꿋하게 버티고 선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하는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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