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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1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도서] 모든 요일의 기록 (1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김민철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4점


작가: 김민철
출판사: 북라이프
출판년: 2015년 7월 10일 1판   1쇄
             2018년 9월 15일 1판 14쇄

서재 결혼 시키기 - 앤 패디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 제인에어의 로체스터 부인의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 제인 에어부터 읽고 볼 것!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 시점에서. 마찬가지로, 로빈슨 크루소부터!(읽었지만 기억이 가물거리므로)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4
안과 겉, 이방인, 시지프 신화 - 카뮈

하루의 취향을 보고 이건 내 영혼의 쌍둥이다! 싶어서 찾아보게 된 같은 저자의 책.
하루의 취향은 혼자 사서 혼자 봤지만 이건 다같이 보고 싶어서 회사 구비도서로 신청해 샀다.

그리고 역시나 좋았다.
매일 아침,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아름다운 것들로 돌파하기 위하여"라고 적힌 자몽빛 책갈피를 끼워다니며 출근길에 짬짬이 읽었고,
덕분에 하루를 버틸 힘을 얻었다.
이 책과 저 책갈피로.

이 책 역시, 너무나도 나를 노리고 쓴 책 같았다.
매 구절구절 공감하고 매 페이지마다 동감한다.
그 책을 읽었던 장소, 그때의 바람, 설렘 등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프롤로그 내 모든 기록의 쓸모에 관하여 - p.8>
그렇다.
랭보의 시 <취한 배>를 읽었을 때 느꼈던 눈 앞에 성단이 보이고 바닷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
현대 희곡 수업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강의실 가득히 내려앉던 절망과 허무함이 감도는 숨막히는 정적.
목욕하면서 읽었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파이 북 클럽>과 조금씩 식어가던 물의 온도.
모든 것이 하나하나 책의 기억에 결부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비록 '음 그거 재밌었던 것 같은데' 밖에 기억이 안 나더라도. 

제 1장 읽다: 인생의 기록
종종 서점에서 파격적인 세일을 할 때면, 누군가 추천해준 책, 살면서 한 번쯤은 읽어야 할 책, 인생의 필독서, 교양인의 바탕이 되는 책,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데뷔작, 교과서에 나왔다는 이유로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책, 모두가 읽었지만 왠지 나만 안 읽은 것 같은 책, 언젠가는 꼭 읽을 것 같은 책 등 각종 책이 각종 이유를 달고 결제되어 우리 집에 도착한다.
<읽다 - p.16>
나는 어떤 책을 사더라? 
내가 흥미있는 책. 보고 싶지만 도서관에 없는 책. 왠지 빨리 절판될 것 같은 책.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예전에 읽고 좋았던 책. 사서 나쁠 건 없는 보장된 책(대체로 고전류)
너무 두꺼워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힘든 책. 밑줄 치며 보고 싶은 책.
붉은 글씨는 너무나도 종감해서 붉게 표시했다. 교과서에 전편이 모두 실린 단편을 제외하고, 교과서에 나온 책을 나는 얼마나 읽었지?
교과서에 실린 책은 실은 한 번도 전체를 읽은 적이 없더라도, 왠지 다 읽은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나에겐 책에 관한 나만의 원칙이 있었다.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정말 마음에 드는 경우에만 사는 거야'라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영원히 새로운 책장 - p.21>
나랑은 반대인 것 같다. 난 대학교 때는 지금보다 (돈드는) 취미가 없었기도 했고, 용돈이 남아도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매달 5만 원 씩, 책에 투자하기로 했었다. 정확히는 '출판 산업'에 투자한다는 생각이었다. 5만 원이 뭐 대단한 투자라고, 싶은 생각은 그 때도 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매달 5만 원 씩이라도 보태는 게 보태지 않는 것보다 명백히 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쁘띠 메세나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 때 산 책은 물론 내가 보고 싶은 책, 좋아하는 분야의 책이 우선 순위였지만, 그 외에도 표지가 맘에 드는 책, 소개 문구가 좋은 책, 성장하길 바라는 출판사의 책(출판사마다 지향하는 도서 라인이 있다는 것도 이 때 깨달았다), 한국에 좀 더 많이 출판되었으면 하는 장르의 책 등이 있다.
그리고 그 때는 잡지류도 많이 사 봤었다. 잡지는 내가 한국에 더 많아지고 더 다양화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서적류 중 상위 랭킹에 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조금 놀라울 정도로 명백하게 '투자하고 지원한다'는 목적 아래 책을 샀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정말 마음에 드는 경우에만 사는 거야'가 원칙으로 바뀌었다.
일단 책 값이 너무 비싸졌고, 내게 돈 드는 취미가 책 말고도 많이 생겼으며, 모든 취향에 대해 대학 시절보다 눈이 높아졌다(눈이 높아졌다는 말은 곧 같은 걸 해도 돈이 더 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만 있게 된 지 수 년은 지난 책들이 내 마음에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
마치 읽기는 했으나 리뷰를 쓰지 않고 밀린 책들의 목록처럼.
그래서 일단 올해의 목표 중 하나는 서재에 있는 책을 최대한 많이 읽고 책은 덜 사는 것이고, 어느 정도 내 장서목록에 미안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다시 전처럼 출판 업계를 '후원' 해 볼 생각이다.
지독한 독서광인 그 부부는 각자의 책을 어떤 식으로 분류할 것인지, 어떤 순서로 꽂을 것인지, 가지고 있는 책이 중복될 때는 누구의 책을 보관할 것인지, 침대 머리맡 책꽂이에는 어떤 책이 꽂힐 자격이 있는지를 꼼꼼하게 의논하고, 끊임없이 부딪히며 서로의 서재를 합치는 그 신성한 의식에 골몰한다.
<영원히 새로운 책장 - p.27>
굉장히 유의미한 질문들이다(그리고 재미있기도 하다).
1. 나는 어떤 식으로 책을 분류하는가?
- 문학: 문학 일반, 한국문학, 영미문학, 프랑스문학, 독일문학, 기타 유럽문학, 일본문학, 중국문학, 그 외 문학, 총서
- 신화 및 민속학(역사랑 엄밀한 구분은 불가하다): 한국신화, 북유럽신화, 그 외 신화
- 기타: 철학, 과학, 미술, 음악, 건축
- 역사: 역사 일반, 역사
- 취미: 여행, 음료, 만들기, 기타
- 기타 잡지류
예전 서재 분류는 대충 이 정도였고, 현재는 그냥 뒤죽박죽이다. 이사 온 후 정리를 안 했어.

2. 어떤 순서로 꽂을 것인가?
- 큰 카테고리끼리는 인접하게, 그리고 자주 보는 것이 눈높이에 오게, 책은 저자 성의 가나다 순으로, 같은 저자에서는 책 제목의 가나다 순으로(한국어 표기법이 우선이며 원서일 경우는 번역본 앞에)

3. 중복될 경우에는
- '예쁨' '보관 상태' '재미있음(낙서나 코멘트가 있다거나)' '의미 있음(누군가의 선물이나 어떤 기념일에 샀다거나 아니면 특별한 추억이 얽혀 있는)'에 점수를 매겨서.
책장이 넉넉할 경우에는 둘 다 보관할 것이다.

4. 침대 머리맡 책꽂이
- 이건 대체로 정해져 있다. 단편집. 자기 전에 한 편씩 읽고 자는 걸 좋아한다.
왜 그곳에 그런 메모를 해놓은 건지, 그 구절의 어떤 부분이 좋았길래 체크를 해놓은 건지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다.
<영원히 새로운 책장 - p.33>
나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예전에는 책에 코멘트를 써 놓는 걸 좋아했는데,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책을 보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한글로 적은 건 분명한데) 도통 알 수가 없는 메모가 있다. 지금 그 책은 삼촌이 빌려간 후 돌아오지 않아 그 메모가 뭐였는지는 잊었지만, 대학 시절에 보고 메모를 해 두었다가 백수 시절 보고 이게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랐던 기억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사실 책을 읽으면서 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또는 코멘트를 하려고 인덱스 포스트잇을 붙여놓고서는 정작 책을 다 읽은 후 리뷰를 하려고 하면 이 인덱스는 왜 여기에 붙어있는 건지 도통 아리송 할 때조차 있는 것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다.
<낭만적 오해 - p.35>
이 문구를 최근 어디서 봤는데, 어디더라.
기억 났다. <랩 걸>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거기서는 성경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여기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기본적으로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닌' 책들이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
하지만 난 계속해서 시도한다.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닌 책들을 읽으려고.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했어야만 했다. <존재와 시간>을 볼 때마다 흐뭇한 기분으로 '이 책과 내가 교감한 순간이 있었지. 암, 그런 순간이 있었지'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어야만 했다. 괜히 신나서 펼친 그 책의 문장을, 나는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낭만적 오해 - p.38>
그렇다. 내가 엄청나게 감동받고 수업 시간에 눈물까지 글썽였던 보들레르의 시집을 2019년에 다시 펴보지 말아야 했던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이다(미래의 내가 이 리뷰를 보다가 오해할까봐 적어두지만, 프랑스어를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명확하게 해석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보들레르의 시가 아름답다는 기억 속에 살고 있다.
아마 김민철 씨도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위로받았던 기억 속에 살지 않을까.
처음엔 아니겠지, 생각했다. 우선은 말수를 좀 줄였다.
<비극이 알려준 긍정의 태도 - p.54>
저 기분이 뭔지 너무 잘 알아서 엄청 공감이 간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설마하는 느낌, 초조감.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해보려는 노력.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비극이 알려준 긍정의 태도 - p.58-59>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4
어차피 일어난 일을 바꿀 순 없으니 태도라도 바꾸는 게 그나마 현명한 것이라는 건 알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가끔은 화를 내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나 또는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면 왠지 바보가 되는 것 같고 억울함이 풀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져서, 혹은 이렇게 사납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야 모든 일이 해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고집스레 더 그런 태도를 취할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건 문제 해결은 물론 내 기분 전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이 문장을 클리핑한 건 사실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대학 시절 배운 그리스 비극과 장세니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운명은 정해져 있고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데서 오는 절대적 절망과 완벽한 비극. 그리고 그로 인한 체념과 허망함.
나는 그리스비극이 좋다. 
아무리 해도 천성 저 바닥 밑까지 밝은 빛이 어리기엔 나는 좀 많이 어둡고 어느 정도는 불협화음과 같은 존재였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 p.65>
어두운 책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밝고 희망찬 책에는 왠지 모를 불신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세상은 결코 그렇게 따뜻하고 밝고 희망차지 않으니까.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 p.67>
이 부분을 읽고 좀 놀랐다. 글 속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치와 유머를 탑재하고선 가볍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그리고 이 책의 가장 뒷부분쯤 이르러서는 아빠와의 불화(뭔지 명확히는 나오지 않지만, 사실 '불화'정도로 가벼운 것도 아닌 것 같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거기서는 자신의 이런 성격의 원인이 아빠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했고.
어쨌든 이 '천성'에 대해서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공감했다.
사실 나는 유년기의 안 좋은 기억도 아빠와의 불화도 없지만 어딘지 천성적으로 어두운 데가 있다. 
어둡고, 냉소적이고 천성적으로 게으름과 쉽게 분리되지 않는 체념적 성향을 타고 났다. 하지만 그게 딱히 뭐 어떻다는 건 아니다. 그런 내 자신이 싫지도 않고 나는 왜 이럴까 자학을 하지도 않고(사춘기 시절에는 좀 했었다)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 딱히 부럽지도 않다. 그냥 이게 나니까.
그리고 어두운 책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 가장 어둡고 우울하고 세상의 모든 게 힘들 때, 나도 크리미널 마인드, 천국의 아이들, 크랙, 행잉록에서의 소풍처럼 온갖 어둡고 찝찝한 이야기들만 나오는 드라마랑 영화를 보고서 위안받았다. 그래 세상은 원래 이렇게 부조리하고 불가해하고 엿같은 거니 지금 내 상황이 좀 안 좋다고 특별히 우울해할 것 없어, 하는 묘한 확신과 기쁨이 떠오르는 것이다.
2012년에 쓴 일기를 찾았다. '크리미널 마인드를 보고 범죄자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를 보고 책을 읽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는 허구보다 믿을 수 없게 끔찍한 일들이 많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도 많을 거고 누군가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거고 다른 누군가는 그런 고통을 가할 것이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겠지. 세상은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다. 그걸 인정하니 오히려 좀 더 편안하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도마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검은 건반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칠판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스피커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계산기로 태어난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 p.66>
나는 뭘로 태어난 사람일까?
검은 건반으로만 치는 쇼팽의 <흑건>은 너무 화려하고 멋진 곡이야. 파이팅!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 p.67>
피아노 선생님인 엄마의 위로. 너무 멋진 위로이다. 하지만 저 말 한 마디를 쓰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까. 
어떻게 하면 딸을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말을 고르고 골랐을까.
그 일상은 바람이 살랑 부는 노천카페에서의 커피가 아닌, 한낮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회사 앞 식당의 점심 속에 있다. 그 일상은 스탠드 불 하나 켜놓고 밤새워 쓰는 글이 아니라 창백한 형광등 빛 아래에서 작성하는 문서 안에 있고, 잘 포장된 초콜릿이 아니라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사는 껌 속에 있다. 보고 싶은 책보다는 봐야만 하는 서류 더미에 더 많이 할애된 일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소통보다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소모되는 일상, 갓 갈아낸 자몽주스보다는 믹스커피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어쨌거나 일상이다.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 p.72> 
그러니 나는 잠시 짬을 내어 마시는 커피에 한숨을 돌리고, 학원에 가는 길에서 새벽이슬에 젖은 나무들에 감사하고, 회사 난간에 서서 저녁노을에 먹먹해진 가슴을 느껴야 한다,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 p.72>
맞다. 내 일상은 그런 곳에 있다.
하지만 내 삶은 회사 속에 있지 않다. 이건 내 자아실현도 아니고, 내 평생직정도 아니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전 과업보다는 재미있지만.
내게 있어, 삶과 일상은 분리된다.
하지만 일상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서관 구석에서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을 발견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 p.82>
그냥 요즘 보고 있는 책이라 반가워서.
나는 카뮈의 <안과 겉>, <이방인>, <시지프 신화>까지 달음박질쳤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왔다.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라니. 출근은 내게 결코 화해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는데.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 p.83>
나도 <행복의 충격>, <결혼, 여름>, <안과 겉>,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를 다 읽으면 출근과 화해할 수 있을까?
일단 <결혼, 여름>과 <행복의 충격>은 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오직 이곳만을 살아가는 것, 쉬이 좌절하지 않는 것,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일상을 살아나가는 것.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 p.86>
대학교 때였나, 써놓은 일기가 있다.
나는 초롱아귀 같다는 것이었다.
과거는 빛바랜 금빛으로 빛나고, 미래는 한없이 어둡다. 비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가는 것이었다.
단지 심해에 사는 초롱아귀처럼, 바로 눈 앞에서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빛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미래엔 바랄 게 없고 과거엔 
나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추억으로만 기억되는 것이고,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현재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를 살고, 순간을 살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제 2장 듣다 :  감정의 기록
누구나 자신만의 셋리스트는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서랍장만 한 음악 - p.118>
나에게도 10개 정도의 셋 리스트가 있다.
그리고 그 안의 내용물들은 때때로 바뀐다.
음악과 나 사이에 생긴 결정적 순간은 평생 그 음악에 달라붙는다. 떨어지지 않는다. 더 강렬한 경험이 와도 처음의 그 경험은 지워지지 않는다.
<서랍장만 한 음악 - p.119>
그렇다. 바네사 메이가 연주한 비발디 사계 중 겨울 2악장, 라르고가 하얀 알파카 코트를 입고 겨울 아침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집을 나서 프랑스어 학원을 나서던 그 순간, 햇빛이 눈 녹은 물방울이 맺힌 상록수의 녹색 나뭇잎에 붙어 보석처럼 빛나는 걸 보던 순간, 침엽수 위에 채 녹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은 성긴 눈더미가 하얗게 빛나는 걸 보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여름 날 서늘하고 어둑한 과학관에서 수업을 듣고 나오며 듣던 헨델의 오페라 크세르크세스 중 아리아 그리운 나무그늘과 달라붙어 그날 본 사르다나팔루스의 대학살 그림과 함께 단단히 결합된 채 어딘지 잔혹하면서도 허망하고 서늘하고 그러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여전히 주고 잇는 것처럼.
계속 노래를 부르며 자연스럽게 할머니는 두건을 벗었다. 앞치마도 벗었다. 그 순간 성당에서 종을 쳤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가는 소리였다. 할머니는 한 손엔 두건을, 다른 한 손에는 앞치마를 들고 성당 쪽을 향해 성호를 그르며 계속 노래를 했다. 두건과 앞치마를 벗고, 성호를 그으며 눈을 한 번 감고 노래를 하는 그 모든 동작이 각본에 짜여진 것 같았다.
<감각의 왜곡, 왜곡의 음악 - p.127-129>
일상의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가 극적이 되는 마법같은 순간. 이런 순간은 잊을 수 없다.
다만, 여행할 때 우리의 귀는 다른 식으로 열린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소라면 지나쳐버렸을 어떤 음악이 평생 간직하고 싶은 행운으로 느껴지고, 평소라면 발걸음을 재촉했을 연주자 앞에서 기꺼이 눈물을 흘려버린다. MP3 플레이어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음악 덕분에 눈앞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지금 이 음악과 함꼐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감각의 왜곡, 왜곡의 음악 - p.130>
런던에 갔을 때 내셔널 갤로리 로비에서 연주하던 두 명의 연주자들. 첼로와 바이올린. 유일하게 발걸음을 멈추고 아예 자리까지 깔고 앉아서 그 음악을 듣던 두 명. 나와, 다른(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국인 한 명. 통성명을 했고, 대화를 나눴고, 좋은 음악을 함께 좋은 장소, 좋은 시간에서 들었다는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웠다.
사실 정말 좋은 음악이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큰 확신은 없지만 그 순간에는 이보다 좋은 음악이 없었다.
진공상태와도 같은 침묵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그 공기를 뚫고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그 소리가 명동성당의 높다란 천장을 돌아 뒷벽에 부딪혀 내 귀로 들어왔을 때 나는 우주의 탄생을 귀로 듣는 느낌이었다. 먼 소리가 둥글게 지금의 나에게 도착하고 나는 먼 소리를 지금의 소리라 착각하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소리를 좇았다. 높은 소리를 신생 별이었고 낮은 소리는 오래된 별이었다. 활과 바이올린 사이에는 공기가 흘렀고 지구와 달처럼 그 공기는 아득했고 멀리서 도착한 빛과 소리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파르티타>. 그리고 무려 <샤콘느> 연주가 시작되었다. 바흐 <파르티타> 2번의 마지막 악장인 <샤콘느>. 연주가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곡. 하지만 그만큼 연주가의 깊이를 들키기 쉬운 곡. 그래서 브람스는 이 곡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가장 깊은 생각과 가장 강렬한 느낌의 완전한 세계"라고. 젊은 연주가의 <샤콘느>는 깊이가 없고, 늙은 연주가의 <샤콘느>에는 기교가 부족하기 십상이다.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그 팽팽한 긴장감의 나이에 <샤콘느<를 위한 나이가 있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울다 - p.139>
그냥 이 문장들이 좋다.
등을 돌리고 앉은 키스 자렛은 간혹 베이스와 드럼을 향해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철저히 관객에겐 무관심했다. 심지어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치는 박수가 그의 음악적 영감을 깨뜨리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키스 자렛은 오로지 음악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오롯이 음악에만 빠져,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흔들었다. 허밍을 했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키스 자렛이 음악 앞에서는 한없이 애교를 부리고, 몸을 부비고, 춤을 췄다. 음악만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춤을 추며 연주를 했다. 
<피아노가 멈추던 순간 - p.146>
키스 자렛의 공연을 한 번 보고싶어졌다.
안다. 타고난 기억력의 소유자인지라 나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곡의 제목조차 알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키스 자렛의 곡들을 다시 찾아서 들어봤지만 비슷한 곡도 찾아내지 못했다. 실은 한 소절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할 기준조차 없다. 아마 다시 그 곡을 들려줘도 나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혹은 음악이 너무 좋다며 이게 무슨 곡이냐고 물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곡을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꼭 기억하고 싶다. 피아노와 새들의 합주를. 피아노가 멈추는 순간 시작되었던 새들의 독주를. 새들의 독주를 듣기 위해 멈춘 피아노를. 
<피아노가 멈추던 순간 - p.148>
나도 사실 음악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굉장히 좋았던 건 기억하는데, 대충 신났던 것 같아, 잔잔했던 것 같아, 보컬이 여자였는데, 반주가 피아노였는데, 기억하는 건 이 정도이다. 다시 들어도 못 알아들을 확률이 높다. 30분 전에 들었던 곡도.
하지만 그 곡을 접했을 때의 기분, 감동, 감촉과도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감각. 그것만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제 3장 찍다 : 눈의 기록
그렇게 찍는 순간은 어쨌거나 나만의 순간이 된다는 것을. 대단하진 않을지라도 나만의 시선은 끊임없이 벼려지리라는 것을.
<찍다 - p.156>
나만의 시선. 그걸 위해 나도 열심히 찍는다. 
사진을 찍다 보면, 내가 어떤 색감을 좋아하는지, 어떤 광경을 좋아하는지, 시야에 들어오는 커다란 세상에서 어떤 것에 주목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다.
강 위에 배가 떠가는 걸 찍을 때에도, 다리와 배의 간격이 얼마나 벌어진 순간을 찍고 싶은지, 그 사이에 사람들이 나왔으면 좋겠는지 아닌지,
구름과 빛은 어떻게 사진 안에 들어갔으면 좋겠는지, 반짝이는 물결은 어떻게 담고 싶은지 수많은 것을 고려해 찍게 된다.
그 결과물이 대단치 않더라도 사진은 내 또 하나의 시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잘 늙고 싶다는 것도 꿈으로서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모든 취업 원서에 '잘 늙기'를 꿈으로 써냈다. 50군데 원서를 내고도 50군데 다 떨어진 건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색깔 - p.181>
잘 늙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내 늙음을 받아들이는 건 또 어찌나 힘든 건지!
대학 시절 생각했던 게 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못 했지만.
매년 내 생일날, 사진관에 가서 전신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과, 손과, 그 밖에 찍고 싶은 부분들을 찍는다.
그 사진들을 모아둔다. 
일 년 일 년, 작년보다 한 살 더 먹은 나를 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년에는 어떤 모습이 되어 사진을 찍으러 올 지.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늙어갈 지.
그러고 나선 해가 갈 수록 내 모습에 깊이가 더해지는 걸 보며 뿌듯해한다. 그리고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음 일 년을 열심히 살아간다.
순수한 열망이었다. 뭐가 될 것 같다는 욕심도 없이, 남들이 어떻게 볼까,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봐야 하지 않을까, 어디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펄펄 끓는 욕망도 아니었고, 자신을 위한 담담한 바람이었다.
<시간의 색깔 - p.186-188>
 여행을 가기 전에는 (특히 쉽게 가기 힘든 곳 일 수록) 쉬엄쉬엄 느긋하게 보자고 결심해 놓고 막상 여행지에서는 조바심을 내게 된다. 
여기도 가보고 싶고 저기도 가보고 싶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사실 그래도 나는 그렇게까지 조바심 내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런던에 2주 머무는 동안 런던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며 대영 박물관만 세 번, 내셔널 갤러리를 두 번 가고 하루는 토스트랑 바나나 하나를 싸들고 공원 산책이나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게 안달이 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달을 내는 것보다 느긋하게 여행하는 쪽이 실은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이 된다.
항상 그걸 명심해야 하는데.
Paris, France, 2013
<시간의 색깔 - p.191>


제 4장 배우다 :  몸의 기록
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 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렇게 비옥하게 가꿔진 토양이 있어야 회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고, 새로운 카피도 쓰고, 새로운 뭔가도 시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배우다 - p.200>
나도 삶의 기본기를 위해 열심히 읽고 보고 쓰고 듣고 찍고 배우고 논다. 하지만 난 딱히 회사에서의 성과물을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즐거워졌으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는 삶을 살았으면 해서.
라틴어와 희랍어라니! 나는 철학과인데! 그럼 당연히!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위 시작했다. 그래! 기초부터 탄탄히 다지는 거야. 영화에서도 보면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모두 라틴어를 배우잖아? 라틴어는 모든 언어의 기본이니까.순식간에 내 책상은 희한한 문자들로 가득 찼다. 독일어는 어떻게 됐냐고? 당연히 뒷전이었다. 배우기는 어려웠지만 잊어버리기는 쉬웠다.
<6개국어 정복기 - p.205-206>
와, 어쩜 이렇게 나랑 라틴어를 배운 동기가 토씨 하나 안 다르고 똑같지!
나도 그랬다. 난 불문과인데! 기초부터 배워야지! 라틴어를 하면 유럽어의 기본을 배우는 거잖아!
그리고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는 뒷전이었다.
뒷전이 된 언어가 독일어인 것까지 똑같아!
나에게 '배운다'라는 말은 장밋빛 미래를 위한 말이 아니라 장밋빛 현재를 위한 말이 된다.
<6개 국어 정복기 - p.209>
그렇다. 나도 본질적으로 뭔가를 배우고 새로 익히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용두사미가 된 '배우다 만 것들'의 시체와 잔해가 한무더기 쌓여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새로운 걸 배우러 찾아 나선다.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심했던 어느 날, 다급하게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오늘 도예 하러 가도 되나요?"
"오늘 원래 수업 하는 날 아닌데요?"
"근데, 제가 오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흙을 좀 만져야 될 것 같아요."
"오세요. 오세요."
<때때로 공방 - p.214>
그렇구나. 이 사람도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는구나.
당연한 사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날, 다급하게라도 연락하거나 찾아가 스트레스를 풀 취미를 두는 게 좋겠다.
이 작가의 경우는 도예 공방이었는데, 난 뭐가 좋을까.
취미도 유전자로 대물림된다. 시아버지에겐 수집의 취미가 있다.
<"병뚜껑은 모을 만하지." - p.223>
세상 모든 취미란 취미는 다 내 취미로 갖고 있는 것 같은 나에게 유일하게 없는 취미가 있다면 수집이다.
책이라거나 영화 팜플렛이나 티켓이나 마테, 예쁜 컵처럼 뭔가를 모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냥 탐욕과 물욕이지 수집이 아니다.
책은 보려고 사는 거고, 영화 팜플렛이나 티켓은 안 모으면 갔다온 걸 까먹으니 보관하는 거고, 마테는 다이어리를 쓰려고 사는 거고, 예쁜 컵은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맘에 드는 컵에 맘에 드는 음료를 마시려고 사는 거다. 
모으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일 뿐.
굳이 뭔가를 모은다면, 취미를 모은다고 하는 게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우표 수집도 해 봤고 마그넷 수집도 해 봤는데 영 나랑은 맞지 않아 금방 그만 뒀다.
정말 기본 중의 기본 취미인 수집이 취미광인 나랑 안 맞는 취미라니, 처음 그걸 깨닫고 왠지 웃겨서 웃었다.
그리고 취미도 유전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문화랑 예술, 예쁜 것들을 좋아하는 건 명백히 엄마 쪽 유전자이고(외할아버지가 미술과 예술에 조예가 깊으셨으며 미술사를 전공하셨다)
그 밖의 이상한 걸 좋아하는 건 아빠 쪽 유전자인 것 같다.
그것도 격세유전.
살아 생전에도 기인이라는 칭호를 달고 사셨다던, 한국전쟁 무렵부터 한국에서 바하이교를 믿었다던 작은 할아버지의 유전자.
양 쪽에서 그런 취미 유전자를 진하게 물려받은 나는 세상의 온갖 예쁜 것과 온갖 신기한 걸 탐욕스럽게 탐하고 다니는 프로 취미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유전자에 밀려 정리 유전자와 청소 유전자, 요리 유전자, 돈 벌기 유전자 등 생활능력 유전자는 급격히 멸종한 것 같다. 슬프게도.
도대체 그걸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꼭 있다. 어쩌면 그들은 무용한 세계가 주는 기쁨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냥 모으는 거다. 재미있으니까.
<"병뚜껑은 모을 만하지." - p.227>
그렇다. 무용한 세계는 유용한 세계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쓸모없는 것 최고!


제 5장 쓰다 : 언어의 기록
그냥 나를 평생 괴롭혔던, 우리를 괴롭혔던, 나의 음울한 성격의 원인이라 추정되는,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지지도 않는 어둠이었던 그 사람이 거기에 누워 있었다.
<쓰기 위해 산다 - p.258> 
크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의외로, 아니 이건 나에게만 의외였겠지만 세상에는 가족 간에 불화가 심하고
심지어는 가족이 고통의 원천인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가족이 고통일 때는, 가족이라서 오히려 더 그 고통이 커질 뿐 아니라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평생을.
예전에는 누군가가 가족에게 받는 고통을 이야기 할 때 (단순히 싸웠다거나 서로 별로 '친하지' 않다 정도가 아닌, 더 심각한 수준의) 무척 당혹스러웠다.
내가 모르는 세계고, 접하지 못한 이야기들이니까. 
뉴스에서나 보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니까.
하지만 크면서, 점점 알게 됐다. 오히려 나 같은 가정 환경이 드물다는 걸.
한 집에 사는 네 식구는 물론이고, 4촌 이내의 자주 보는 친척들 사이에서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가정문제를 겪는 집안이 없다.
다들 잘 산다. 물질적으로도 엄청나게 풍요롭진 않지만 부족할 건 없이 살고, 정서적으로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이게 얼마나 혜책받은 환경이었는지 그 전에는 몰랐다.
지금은 누군가의 불행한 가정사를 들어도 당혹스럽거나 불편함에 어쩔 줄 모르는 일은 없다.
그냥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비단 가정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렇다.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고, 비교도 하지 않고, 그냥 듣는다. 그 사람이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는 만큼 듣는 나도 진심을 다해서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지만, 그게 가장 최선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적어도 복기할 기회가 주어지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니까. 내 감정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니까. 그 사람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니까. 아니, 이해해보려고 적어도 노력해볼 수는 있으니까. 그러니 쓴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쓰기 위해 산다 - p.261>
나는 글을 왜 쓸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게, 나는 글을 왜 쓸까?
그건 아마 그냥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걸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보고 재미있으려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혀야 한다, 조사 하나라도 덜그럭거려선 안 된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모호한 구석은 사라져야 한다, 군더더기가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이것은 광고 카피다.
<살기 위해 쓴다 - p.268>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글. 모호함도 군더더기도 없는 글.
이런 글을 쓰는 게 가장 힘들다.
글은 아니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가 생각난다.
<새>에 대해 영화를 공부하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수님이, <새>는 정말 잘 만든 영화인데 그 이유가, 뭐 하나 더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뭐 하나 뺄 것이 없는 영화라서 그렇댔어."
뭐 하나 더할 것 없는 걸 만들기도 쉽지 않지만 뭐 하나 뺄 것 없는 걸 만드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렵다.
군더더기 없는 것.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살기 위해 쓴다 - p.269>
TBWA의 입사시험 문제 중 하나로 추정되는 문제.
엄청나게 재밌어 보인다.
언젠가는 이걸 주제로 써보고 싶다.
어느 날 문득, 불안해졌다. 내게 그토록 익숙했던 밤의 문장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카피라이터가 되면서, 남편을 만나면서, 이전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많이 달라져버린 것 같았다. 확실히 생각은 단순해졌다. 감정도 직선으로 흐를 때가 많았다. 한 발 빼고 남의 이야기로 흘려버리는 때가 많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라고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감정의 끝이 많이 뭉툭해졌다. 문장 하나에 열광하는 일은 더 잦아졌지만, 문장 하나에 아파하고 끝없이 생각하고 우울해하고 결국 일기장을 꺼내는 일은 사라져버렸다. 속은 텅 비어갔지만, 사는 게 괜찮았으므로 나는 괜찮았다. 심각한 생각은 쓸데없는 구덩이를 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도 자각도.
그러다 보니 나는 대충 괜찮아졌고,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자,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물론 하루라도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저 버티는 건 정말 사는 걸까'라는 노래 가사 한 줄을 며칠 동안 곱씹던 20대는 지금 내겐 너무 버거웠다. 누구의 20대가 안 그렇겠냐만은.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다.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으면서 20대의 나를, 그때의 글쓰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불안했다.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불안함이었다.

***

그렇게 살다가 이 책을 제의받았다. 처음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뭘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닥치는 대로 써보다가 문득 다 멈췄다. 이렇게 쓴 글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생각을 시작했다. 가벼운 노트 하나와 연필을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오랫동안 중단했던 생각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고, 사진들을 들추어 보았다. 남편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노트를 꺼내서 끄적이는 순간이 많아졌다. 잡지를 보다가도 갑자기 노트를 꺼냈다. 생각의 공장이 다시 가동된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상하게도, 우울하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더 이상 땅굴을 파고 은닉하지도 않았다. 생각을 그만둔 동안 나의 다른 부분이 성장했다는, 품이 넓어졌다는, 혹은 세상의 다른 면도 알게 되었다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나는 생각을 그만두지 않았었다는 확신에까지 이르렀다.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 책 덕분에 읽고, 쓰고, 듣고, 보고, 찍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을 다시 손에 쥐게 되었다.
<살기 위해 쓴다 - p.273-275> 
요즘의 나다. 작년, 2018년 9월 19일의 토막 일기에도 썼듯이, 감정이 둔해지고 미적 감각이 뭉툭해진 나를 느끼고 위기감이 왔다.
더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나뭇잎이 연한 녹색과 짙은 녹색으로 선명하게 음영지는 것에 전처럼 감동하지도 않았고, 석양이 비쳐드는 거실에서 그 석양이 얼마나 주홍빛인지, 예전 친구네서 감탄했던 예쁜 형광 오렌지빛의 크레욜라랑 얼마나 닮은 색인지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재생 프로젝트. 풀네임으로 하자면 <회사 다니면서 뒤져버린 미적 감각 되살리기 프로젝트>.
책의 내용으로 보건대, 이 작가는 서른여섯에 이 책을 쓴 것 같다.
나는 서른 셋. 이 무렵이면 다들 이런 고민을 할까?
격정적이고 격렬했던 지난 20대를 떠올리며 지긋지긋해하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그때는 자산이라는 자각도 없이 당연하게 지녔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게 느껴져 당혹스러워 하고, 조바심을 낼까?
내가 '어른'이 되어 버린 것에 텅 빈 공허함을 느끼는 걸까?
하지만 작가가 그랬듯, 나도 찾아낼 것이다. 더 넓어지고 더 성숙한 30대의 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여전히 품고 있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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