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진이, 지니...세상 밖으로 나온 지니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그동안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악마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갔던 작가 정유정이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다. 다름 아닌 ‘빙의’된 인간의 삶과 동화된 또 하나의 생명체인 유인원 보노보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세상으로부터 ‘도태’ 혹은 퇴출된 한 남자의 이야기가 가미된다.
연결고리를 어떻게 매치시킬지 처음엔 의아하게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 ‘그렇구나’ 싶은 변곡점이 나타나면서 글이 술술 풀렸다. 그녀는 전형적인 무대를 예비해 둔다. 소위 준비된 무대 위로 연극의 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번에 마련된 장치는 무곡마을이다. 그녀의 소설에서 보여준 각각의 공간들이 여지없이 이곳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무곡마을, 인동호 별장, 영장류연구센터, 정주소방서, 정주의료원이 하나의 준비된 소품이다. 여기에 생활하던 사육사 이진이와 세상으로 내던져진 민주, 그리고 머나먼 고향 콩고를 떠나 이곳 별장에서 갇혀 지내던 보노보 지니. 이들은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일시에 헤쳐 모인다. 물론 이전에 각각의 인연에 대한 언급이 초반에 소설의 씨줄로 출발한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센터장이던 장교수의 로드킬 회피, 교통사고로 지니와 진이가 빙의되고, 이를 민주가 목격하면서 치열한 3일간의 여정이 시작된다.
‘모차르트’로 불린 천부적 공감 능력(경청과 존중을 통한 소통)이 뛰어난 민주, 그리고 동물과의 교감이 뛰어난 진이. 둘 다 공통점이 있다. 보노보 지니 역시 자신의 동생을 향한 사랑은 인간 못지않은 헌신적인 공감력을 소유했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 민주는 공익근무 시절 쪽방촌 해병대 노인의 외침을 무심코 넘겨 죽어가는 이를 외면했다는 고통. 진이는 콩고 왐바 캠프에서 마주친 보노보를 구하지 못하고 외면했다는 아픔. 킨샤사의 보노보 지니는 어린 동생을 보지 못한 채 머나먼 곳으로 잡혀왔다는 고통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소설은 중반 이후로 빙의된 진이가 자신의 몸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보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진이는 유체이탈을 해서 지니에게 빙의했다. 보노보 지박령(육체적 죽음을 맞기 전에 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영원히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된다)이 되지 않으려면 다정한 그녀의 심장이 멈추기 전에 화엄법사를 찾아가거나 자기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P.211).
그러다가 지니 몸에서 벌어지는 두 영혼의 대결이 본격화되면서 처음엔 점령군 사령부라 여긴 진이, 곧이어 그게 아니라 오히려 지니 몸에 기생한 자신이 서서히 지니화되어간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지니에게 빚진 인생인지를 깨닫는다. 마침내 자신이 할 일이 무언지를 깨닫고....
한편,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음이 아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P.48)으로 여겨 방황하던 민주 역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이유가 있어야 협력한다’(P.164)는 이기적인 발상에서 진이를 돕지만, 그녀의 삶을 목도하면서 서서히 ‘다정한 그녀’의 삶에 동병상련의 심정이 되고 마침내 그녀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된다. ‘지니의 몸은 삶을 두고 벌어지는 두 자아의 전쟁터’(P.266)였고 이를 본 민주, 그리고 ‘삶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P.293)던 엄마의 삶의 방식에 진이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자 했으나 지니를 통해 보다 숭고한 삶으로 거듭난다. ‘유인원과 인간이 동화된 완전체 호미노이드’(P.338)로 탄생한다. 비록 인간 진이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보노보 지니는 진이의 마음을 간직한 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다소 지루하게 시작된 이야기가 감동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시공간을 오가면서 민주, 진이, 지니에게 펼쳐졌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종횡무진 전개되며 이들이 하나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살아온 시간에 비해 단 3일 만에 극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하나의 날줄이 완성된다.
그 감동의 서사 속으로 직접 빠져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