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 (미친 짓) 두 번 할까요...그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배우 권상우 하면 생각나는 건 역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다. 더불어 최지우와 열연한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다. 특유의 혀 짧은 발음 덕분에 패러디도 유행했던 미남 배우다. 그리고 배우 이정현은 역시 가수로 익히 알려졌고, 특히 영화 ‘군함도’의 열연을 잊을 수 없다.
여기에 배우 이종혁은 영화에선 그리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지만 ‘미스터 소크라테스’에서 신 반장이 기억난다. 물론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권상우와 동반 출연했었고.
박용집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흥행엔 재미를 보지 못한다.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17만 명의 저조한 성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미 비판적인 평가는 익히 접해왔을 줄로 믿고, 다른 각도에서 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선, 영화의 내용이 ‘이혼식’이란 소재다. 여기에 최근 트랜드를 반영한 애견 간의 결혼식이 가미된다. 그리고 진부한 삼각관계도 등장한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마도 서로 떨어져서 생각할 틈을 가진다면 재혼도 가능하단 논리이다. 워낙 이혼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살다보니 살면서 아웅다웅할 바에 차라리 이혼한 후 친구처럼 지내다 좋아지면 다시 결합하는 것도 괜찮다는 식이다. 이에 반대할 근거는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이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만은 않기에 다소 부담이 되는 주제다.
코믹성을 가미하여 무거운 주제인 이혼을 희석하고 있으나 이 역시 아쉬운 감이 있다. 그러나 결혼이란 굴레에 얽매여 불행한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차라리 이혼을 통해 각자의 길을 갈 수만 있다면 죄악은 아니다. 문제는 영화에서 이를 극복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작 헤어지고 나니 외로움과 더불어 남성 의존적인 삶을 살던 아내가 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 전남편에게 매달리는 광경에 아마도 여성들은 볼썽사납게 여겼을 수도 있다. 지지리 궁상맞은 4차원의 전처를 바라보는 시각이 왠지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구차하게 보일 수도 있었단 얘기.
그러나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비록 돌싱이 되자마자 그동안 억눌렸던 삶에서 벗어나 삶의 활력소를 찾은 현우(권상우)는 회사내에서 유능함을 드러내고 출근시 여유로움도 느껴지는, 반면 선영(이정현)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교통사고를 내고 앞가림을 못하면서 현우를 괴롭힌다. 어쩌면 미련일 수도 있고, 결혼생활 내내 오직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온 내력일 수도 있다. 그런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애증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구차해 보일 수도 있으나 이 역시 어떡하던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 달간의 해외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터, 한편으론 자성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재결합의 의지도 불태우고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선영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전문직 여성이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남편을 찾은 건 그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상주하고 있단 얘기. 결코 자존심 따위에 휘둘리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재결합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거다.
이혼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유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그녀가 결혼생활 내내 현우의 모습을 지켜보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워라벨’과는 거리가 있는 상사(성동일)의 성격을 보건대 매일 퇴근후 회식을 빙자한 일의 연장선에서 밤샘했을 터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유능하게 비춰질 수는 있었지만, 가정생활은 충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죽하면 현우는 싱글을 꿈꾸게 되었을까. 그건 바로 일과 생활, 두 가지를 다 잘 해낼 수는 없었단 결론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면 과연 우리 실정에서 무조건 가정을 선택할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N세대 젊은이들은 워라벨에 목숨을 거니까 가능한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결혼에 회의를 느꼈으니 더더욱 가정에 충실할 수 없을테고, 급기야 아내는 우울증으로 다양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혼식이란 자신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기록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 정도로 절박했고,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상대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은 결코 허투루 나온 얘기가 아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과 출산은 한 남자에게 일생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맡긴 인생에 한순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릴 때 받을 충격을 과연 남성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단지 비난 일색인 영화 관객의 다수는 아마도 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들의 일이 아닌 것에 냉혹한 게 세상 이치다. 가십거리이자 가벼운 에피소드 정도로 여길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당사자라면 과연 웃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넘길 수 있을까.
두 번째. 그녀가 미울 수 없는 이유는 그녀 역시 커리어 우먼이다. 거기에 가정생활도 이어가야 하는 슈퍼우먼이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가혹할 정도로 일의 강도가 심해졌다는 이야기고, 그런 그녀에게 남편은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필요할 때 남편은 야근으로, 회식으로 회사 일로 아내의 관심 밖으로 나돌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소박한 꿈은 차치하고 함께 이뤄야할 ‘워라벨’을 깡그리 짓밟아버렸단 얘기.
그녀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부장은 회사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노골적으로. 거기에 살아남으려는 직장인의 한계 때문이라도 가정에 충실할 수 없었을 터이고,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혼 후에도 여전히 전남편을 부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남편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라고.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그런 그녀를 귀찮게 생각하고 ‘이라또(또라이)’로 매도한 전남편의 의식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유능한들 가정을 파괴한 후 그리 당당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죄의식 하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가벼운 짜증이 난다. 이를 감내하고 여전히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호소에 귀를 기울였어야 한다.
한편, 현우의 고교동창인 상철(이종혁)의 등장은 삼각관계를 통한 가정회복을 암시한다. 아무리 선영이 노력해도 멀찌감치 가버린 현우의 마음을 다잡는 건 한계가 있다는 설정이다.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오히려 현우보다는 선영 입장에서는 상철의 마음이 더 따스하게 느껴진다. 순진남이자 열혈남. 수영도 미숙한 상철이 순간적으로 용기를 내어 목숨을 걸고 선영을 구한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다. 첫눈에 반했던 것. 사랑은 불꽃이 튀어야 한다. 그런 사랑이 식으면 현우 꼴이 나겠지만 최소한 상철의 행동은 매너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 어느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정작 자신의 연애 코치가 전남편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상상하기 어려웠을 터. 이 역시 현우의 잘못이다. 연애 코치를 당장 그만두었어야 한다. 이는 전 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극히 가식적이고 즐긴 거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상철의 순수한 사랑과 현우의 뒤늦은 후회가 어울려 ‘견혼식’과 ‘결혼식’의 말장난 혼선에서 찾아온 ‘재혼’은 어설프다. 중차대한 두 사람에 대한 삶이 희화되어 사람들의 도마에 오른 격이니.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쉽게 말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철이 낙심하는 장면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결코 상철이 상처를 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랑한 게 죄는 아니기에. 오히려 현수의 찌질함이 막판 반전으로 나타나지만 감동스럼진 않다. 그저 남 주기는 아깝고 내 거로 하기엔 그렇고...결혼이 ‘계륵’인가.
결혼하면 행복한가란 주제와 이혼하면 과연 행복한가에 대한 두 논제에 대한 결론을 원하지만, 정통방식에 의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관객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엔 부족하다. 이혼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 채 그저 유치찬란하게 삼각관계 설정을 통해 다시 재혼하는 걸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혼을 너무도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어 이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결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의미에서 재결합이란 결론으로 정리한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다.
이는 단지 영화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결혼생활을 20년 이상 해본 결과 만만치 않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는 한 언제든지 두 조각 날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그 동안의 삶에서 배운 지혜다. 부디 이혼을 강요하는 사회가 행복하단 논리로 치닫는 위험을 경고한 이 영화가 사장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비록 유아틱한 발상이라도 결혼은 유지하는 걸로, 그것이 행복한 걸로 귀결된 ‘미친 짓이라도 두 번, 아니 세 번이라도 해야한다는 것에 기꺼이 찬성하는 이유다’
영화를 감동으로 다가가지 말고 이해로 다가가면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 영화가 있어 세상은 살만할 수도 있다. 만인이 아니라고 해도 단 한 사람이라도 맞다고 한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는 게 한 영혼을 구하는 거룩한 삶이 아닐까. 결코 성자같은 논리로 다가오길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