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읽었다. 블로그 활동이 뜸하니 마음의 양식을 쌓는 것도 도외시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허함은 더해가고 올 가을, 무언가 남기고픈 마음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리고 아주 힘겹게 끝냈다.
역사학과 교수인 김형인 저자는 미국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와 노예해방을 외친 북부가 각기 성서를 근거로 삼아 펼쳤던 그들의 논리를 해부해 보았다. 과연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었을까
성경은 신,구약으로 나뉘어져 있다. 구약은 모세를 중심으로 한 율법에 의지하였고, 신약은 예수 등장과 함께 믿음에 기반을 두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야누스적 측면을 끄집어낸다. 노예제를 수호하는 이론적 배경부터 노예제 폐지의 근거로 성서를 끌어들인 남북부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양측 모두 성서의 논리를 끌어와 명분을 삼은 것에 공감한다. 나름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단 얘기.
저자는 성서의 구분 해석과 특성 및 텍스트 내용을 통하여 노예제 찬반의 근거가 되었던 논리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신구약 성서의 해당 구문과 설교, 팸플릿(씨월 판사의 ‘팔려가는 요셉’(P.31), 에세이(버지니아 정치가인 아서 리(P.46))등을 근거로 삼아 노예제의 이론과 실제를 정리하고 있다.
노예제를 둘러싼 해석이 19세기 후반 민족주의 사학자에 의해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에겐 이상에 불타는 개혁가로, 노예 옹호론자인 남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지각없는 무리로 비판을 받는다.
1920년대 들어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둘러싼 도덕 대결이 아닌 북부의 산업세력이 남부의 농업사회정복론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남부의 역사를 재평가하게 된다. 2차대전후 미국 예외주의와 용광로 이론을 통해 노예옹호론자의 재평가는 다시 뒤집어진다. 그결과 타락한 군상으로 전락한다.
1960년대 북부 노예폐지론자는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처사에 불과하며 남부 노예옹호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현대에 들어 찬반론 모두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시각이 혼재한다. 어떻든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
이제 구체적인 성서 구문을 통해 살펴보자.
우선 북부의 노예해방론의 근거를 찾아보면, 마태복음 5장-7장, 산상수훈 내용 중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메노 교도의 기독교 황금률을 근거로 평등을 촉구하며, 믿음의 기초로 삼아 노예제 폐지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한다. 씨월 판사는 창세기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이야기인‘팔려가는 요셉’을 통해 참회하며, 자유는 생명에 버금가는 소중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어 아담의 자손임을 근거로 제시한다. 아울러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아덴 전도와 창세기 3장 20절 및 모세 십계명을 들이댄다.
하지만 노예제를 옹호했던 법률가 사핀은 씨월의 견해에 반박하는 성서의 근거를 가져온다. 이교도를 노예로 인정하는 성경구절과 창세기 이래 노예제가 존속했다는 점을 들어 성서가 노예제를 승인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창세기 가나안의 아비인 ‘함의 저주’로 셈의 종이 된 것과 창세기 아브라함이 이주시 대동한 사람, 다시 말해 노예를 들먹인다. 여기에 씨월은 다시 반론을 한다. 함의 저주 대상자가 함의 막내 아들인 가나안만 해당하며 가나안의 형인 구스는 함의 저주와 무관하단 논리다. 단지 기브온인만 노예였다는 것이다.
한편, 침례교 목사인 퍼먼은 씨월의 주장에 동조하며 근거로 가나안인이 모두 죽음을 당하며 성서가 노예제 용인 근거로 ‘희년’에서 찾고 있다. 결국 함의 저주는 남부인이 믿어온 성경의 근거일 뿐, 씨월은 구스인(에티오피아)의 검은 피부는 환경탓이며 예레미야의 구절을 인용해 흑인 구원을 역설한다. 따라서 함의 저주와 구스는 무관하다고 일갈한다.
남북의 노예제 찬반이 가져온 한계를 살펴보자. 북부는 노예제를 반대하며 공화제를 표방한다. 그러나 공화제는 인종주의를 불러온다. 유산계급인 유럽인, 자유노동자인 아프리카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으로 인종이 나뉘어지며 세금을 낼 수 있는 책임있는 시민인 유산자에 의해 사회가 지배된다. 이것이 공화주의다. 반면 민주주의는 일종의 선동주의로 동등한 참정권을 주장한다. 공화주의와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다. 하지만 북부는 자유주를 중심으로 주 헌법에 강제노동 폐지 조항을 새겨넣어 노예해방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다만 노예제의 변질된 측면을 보면 비록 노예해방을 외치지만 자유흑인 신분은 차별대우라는 인종적 성격으로 변해가며 이동과 계약의 자유가 있으나 시민권과 투표권이 없고 흑인법에 의해 통치되며 결과적으로 노예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일시된다. 단지 이동의 자유만 남았을 뿐 내용은 노예와 별차이가 없다.
남부는 노예가 농기계 역할을 한다. 담배부터 쪽농사를 거쳐 면화, 쌀, 사탕수수에 이르기까지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상 농업은 필연적으로 인력수급을 필요로 하며 이에 노예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어 아프리카로부터 노예사냥꾼에 의한 노예공급이 이루어진다. 노예중심으로 산업 중심축이 이뤄지니 노예제는 당연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남부는 노예제를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경제적인 제도 때문이다. 이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으며 생활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노예제 포기는 곧 그들의 생활양식을 포기하는 걸 의미한다. 생존과 직결된다는 의미.
이제 노예제 폐지론자와 찬성론자의 주장을 분야별로 구분해 살펴보자.
노예폐지론자는 정치적 측면에서 자유, 평등의 기치는 공화주의 병행이 불가하지만, 옹호론자는 그리스 로마 공화제는 민주제하에서도 노예제가 유지되었기에 병행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전자는 강제노동은 비효율적이며 노동, 자본 손실을 가져와 경제수익성을 낙후시킨다고 주장. 반면 북부 산업제에 비해 수출 측면에서 농업 비중이 큰 남부는 장기적 관점에서 수익성을 유지할 비전이 없다. 윤리적 측면으로 보면 인륜에 위배되며 도덕적으로도 사악하다. 하지만 혹독한 자본주의에 시달리는 북부의 자유노동제가 더욱더 비인도적이고 오히려 남부의 가부장적 온정주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노예제 옹호에 나선다. 사회적 측면에서 노예근성으로 백인까지 게으름이 만연하고 흑인 여자노예는 성희롱 희생양이자 풍기문란을 야기한다. 그러나 남부의 주장은 게으름 상관관계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호색적인 공격성을 흑인에게 돌려 백인 여성의 순결을 유지한다고 강변한다. 인종적 측면에서 흑인도 아담 자손이라는 단인종설에 비해 남부는 흑백인종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다인종설을 주장한다. 종교적 측면에서 황금률에 의거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한다는 북부의 주장과 함의 저주로 촉발된 기독교 교리는 관행인 노예제에 대한 비난이 없었다는 점과 이교도의 노예를 금하지 않았다는 점, 퍼먼 목사의 주장과 희년을 근거로 삼는다. 그 외 듀 교수의 적극적 선 추구를 위해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데 비해 프롤레타리아 보다 낫다는 이유로 노예제를 옹호하는 명분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노예제 찬반론의 한계를 정리해보자.
노예제 폐지론자의 한계는 기독교 교회가 노예제를 용인해 왔으나 항변하지 못했고 성서에서 구체적인 구절을 찾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찬성론자들이 훨씬 많이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개별논리보다는 전체적인 컨텍스트, 기독교 기본 정신에 호소하여 인류가 모두 형제로 평등하다는 성서의 이치에 주력한 광의적 해석에 머무른다.
노예제 찬성론자의 한계는 일단 노예제 인정 사례를 구약에서 풍성하게 찾아내지만, 기독교의 일반정신이나 황금률에 의거시 항변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따라서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중시하는 근본주의로 흘러 성경무오설. 성경 오류 절대 불가설을 주장하여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결국, 성경은 야누스적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각자의 해석에 따라 논점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본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될 수 없다. 단, 승자의 편이 하나님이 지지하는 곳이라고 할 밖에. 지극히 간단명료한 해석이다. 하나님은 이기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