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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도서]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빅터 프랭클 저/마정현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라는 본서는 빅터 프랭클씨의 로고테라피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모은 강연집입니다. 이 책은 저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 이어 세 번째 접하는 빅터 프랭클씨의 저서였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의 극한의 인생 역정과 로고테라피의 대략을 처음 대하는 저서였고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로고테라피라는 그의 심리치료의 이론적 바탕을 깨우칠 수 있는 저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는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에 바탕한 철학으로 일반 대중 또는 자살의 유혹을 느끼거나 질병의 고통이나 죽음을 앞두고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 번의 강연을 바탕으로 저술된 책입니다. 

 

그의 외침이 설득력 있는 것은 그가 실제 인류적 차원의 대재앙을 경험하고 살아남아 그로부터 깨달은 인생의 교훈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한가한 삶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 그저 사색의 결과만을 떠벌리고 있었다면 아무리 들어 볼 법하다 해도 그의 주장은 그럴싸한 훈계질 그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그의 로고테라피는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겠나'하는 반감이 생기는 면도 있을 수 있고 다분히 그럴듯한 충고일뿐이라고 생각되는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설득력 있는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그의 인생의 한 여정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본서는 자살의 유혹을 느끼거나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또는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작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그런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있을까요? 

 

그는 삶에 권태를 느낀다는 남녀 두 내담자의 실화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둘 다 '삶에 바라는 것이 더는 없어서'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불평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바라는 바가 없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을 기다리는 무언가는 있었다고 하는군요. 남자에게는 학술적 저술이 여자에게는 멀리 외국에 살며 연락이 두절된 자녀가 그들을 필요로 했다고 합니다. 이 실례를 바탕으로 저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삶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 대신 "삶이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을 수 있는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내 앞에 놓인 인생의 과제가 무엇인가하고 말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인생에게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며 우리는  답변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 자체는 질문 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 존재는 모두 인생에 대답하는 것, 책임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는 역설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생각에서 보면 미래는 있건 없건 우리를 더는 놀라게 하지 못한다며 현재가  전부다, 현재야말로 끝없이 새로운 삶의 물음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로고테라피에서는 기본적인 이론의 바탕이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음을 압니다. 삶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대답하고 책임지는 존재다라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현재가 전부다라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힘겨운 절망 앞에서 현재만을 바라본다면, 미래라는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 버티겠나 하는 의문이 이니까요. 사실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언제 끝날지도 짐작 불가능한,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재앙이라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현실, 벗어나고픈 일상에서 의지 할 것이라고는 미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때에 미래가 곧 희망이 현실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빅터 프랭클씨가 현재가 전부다라고 말한 이유는 뭘까요? 

 

그가 그의 저서 마다 싣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현실의 괴로움을 버티지 못하던 노인 한분이 환청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들리는 목소리에게 언제 전쟁이 끝나느냐 더 정확하게는 언제 자유의 몸이 되어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환청은 정확한 날짜를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렇게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짜가 다가오는 데도 강제 수용소에 갇혀 하루 한끼 스프 한모금으로 때우며 하루의 대부분을 버거운 노동을 해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 못하면서 언제 가스실로 옮겨져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현실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 노인은 환청이 이야기 해준 날짜가 가까와오자 몸져 누웠고 해당 날짜의 바로 전날 상태가 악화되다가 당일이 되자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 경험을 통해 섣부른 희망은 좌절과 함께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겁니다.

 

기쁨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결과가 모습을 드러내듯,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에 행복은 결코 목표가 돼선 안되고, 될 수도 없고, 되지 못하며 오직 결과일 따름입니다.

 

 

이젠 그가 행복은 결과이지 목표일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이고 만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이지만 그런 절대적인 운명에 내던져본 그이기에 그의 운명관은 참담할 정도로 무겁습니다. 

 

자기 운명에 저항하는 - 즉 실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에 저항하는 - 사람은 운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운명이란 바로 우리 삶의 일부이고, 그 어떤 운명적인 것도 완전체, 즉 현존재의 형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절대 전체에서 혼자 뚝 떨어져 나올 수 없습니다. 

 

 

이토록 무거운 운명관을 지닌 그이지만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은 우리 인생의 일부이고,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과된 것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의 과제입니다. 이로부터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생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생에서 무거운 운명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해도 그 역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힘든 삶이라고 더 의미 있는 삶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 의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있자고 고통을 모두 떠안아야 할 필요는 무엇일까요? 게다가 모두가 고통을 이겨내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고통이 뚫고 지나가 상처만으로 낭자해져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의미를 찾아라 그 지나간 고통을 잊고 다시 일어서는 게 의미다라고 해야 하는 걸까요? 

 

이쯤이면 로고테라피라는 것은 무의미하고 슬픈 생이라는 것의 실체에 의미를 덧입히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하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기에 로고테라피가 나름의 역할은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질병에서도 죽음에서도 의미의 상실만이 아니라 의미를 충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느끼며 죽어간 한 여성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삶의 의미는 대부분 우리가 외적인 운명과 맞닥뜨렸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고, 더는 계획할 수 없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것을 바꿀 수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씨의 로고테라피는 이해가 쉽습니다. 명쾌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녹녹치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의미있는 가르침인 것은 그럼에도 우리에게 의미 잃은 삶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개인의 일회성은 오히려 (유기체에 대한 각 세포의 기능적 의미와 유사하게) 더 중요한 전체, 즉 인간 공동체에 자신을 연관시키면서 가치의 의미를 보존합니다. 일회성은 일회성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를 위할 때만 비로소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씨는 우리가 보다 의미를 발견하기 쉬운 길도 제시합니다. 유한한 인생 한정된 개인이라는 데서 벗어나 전체를 위해 인간 공동체에 공헌하며 가치를 지니라고요. 의미는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발견되는 것이다라는 것이 로고테라피의 가르침입니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신의 한계에만 짖눌려서 생을 한탄하기만 하기보다 보다 큰 전체를 위하여 생을 살아가겠다는 의미 부여도 무의미해져 버린 삶에 생동감을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삶에 바랄 것이 사라졌다" "이 고통에서 무슨 의미를 찾으라는 말이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되신 분들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그리고 본서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를 권해 드립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있는 순간까지 삶을, 운명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요. 그 감당해야 하는 날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더이상 살아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그러니 의미를 찾을 길을 함께 걸어봅시다. 그 첫걸음이 어려울 때 빅터 프랭클씨의 조언들이 우리를 다독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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