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힘을) 믿는 (문구)인간에 대하여
<아무튼, 문구>를 읽고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선뜻 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할 듯하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쉬는 시간(가끔은 수업 시간)마다 친구들과 지우개 따먹기에 열중했고,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교과서와 문제집에 중요한 (대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내용에다가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댔고, 직장생활자가 되고부터는 크고 작은 포스트잇을 전투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70억 지구인 속에서 문구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기록한 <아무튼, 문구>의 저자는 같은 질문에 '미도리 노트'를 으뜸으로 꼽는데, 그 이유가 제법 구체적이다. 여러 차례 테스트를 거쳐 잉크가 번지지 않는 종이 재질과 낱장을 넘길 때 나는 경쾌한 소리가 마음에 들 뿐만 아니라 가죽 커버까지 씌울 수 있어서 지금까지 스무 권 가량의 일기장으로 써오고 있으며, 심지어 지금 다니는 회사 면접에서 합격하는 데 부적과도 같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기만의 책상에서 일기장을 펴고 펜을 들어 글을 써내려가거나 혹은 그림을 그리면서 생기는 차분하고 고요한 순간들을 즐긴다고 한다. 머릿속을 채운 복잡한 생각이나 고민을 밖으로 꺼내 보내는 일은 문구가 건네는 위로와 응원의 시간들 속으로 스며드는 것과 같으리라. 이처럼 노트 하나에 대한 진심만 봐도 다른 문구들을 어떠한 마음과 철학을 갖고 대하는지 쉬이 짐작이 되어 눈길을 거두려는 찰나, 신나게 어딘가로 가는 문구인의 모습이 보여 함께 따라가본다.
지치고 힘든 어떤 날 예전에 쓴 일기들을 읽으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위로를 해온다. 나름대로의 걱정과 고민을 짊어지고 있었던 그때의 내가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다 지나갈 걸라고, 결국엔 다 가벼워질 것들이라고.(21쪽)
문구인답게 문구세권(문구+역세권)에 사는 저자는 일요일 저녁이 되면 집에서 10분 거리에 문구점들을 탐방하는 루틴을 갖고 있다. 오래된 문구점에서부터 대형 문구점까지 문구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저마다의 특색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형마트와 골목시장의 관계처럼 대형 문구점에 비해 물건 가짓수와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동네 문방구에 대한 걱정에 공감이 갔다.
또한 문구인으로서 언젠가 자신만의 문구점을 여는 게 꿈이라는 저자가 학창시절 부모님이 문방구 사장님인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초등학생이던 내게도 부모님이 문구점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어서 새로운 완구류가 나올 때면 최신 정보를 입수해 학교가 파하자마자 달려가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졸랐던 기억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이밖에도 동묘, 서점, 공구상, 옷가게 등 문구점 아닌 문구점 소개를 통해 문구가 문구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 (문구) 여행을 다니면서 기록한 외국 문구점의 특징과 차이점도 퍽 흥미로웠다.
책상 위에 부지런히 사물들을 들여놓고 사용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결국 나의 삶을 가꾸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살뜰히 가꿔야겠다. 책상도, 나의 삶도.(38쪽)
한 때 인스타그램에서 '왓츠온마이데스크(#whatsonmydesk) 릴레이'가 유행했던 것에 착안하여 저자는 '왓츠인마이백(#whatsinmybag) 릴레이'를 제안한다. 작업실이나 서재의 책상 위 소품(문구)들을 공개하는 일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소지품을 보여주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전해주지 않을까 싶다. 솔선수범의 자세로 저자부터 문구인의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인 책상을 공개한다.
먼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상 위 문구는 도쿄의 한 편집숍에서 데려온 '황동 캘린더'와 방콕의 한 마켓에서 산 '태엽 시계'이다. 매일 일자와 요일을 한 칸씩 돌려서 쓰는 만년 캘린더와 매일 태엽을 감으면 우렁찬 초침소리를 들려주는 시계를 최애하는 까닭은 귀엽고 아기자기한 물성은 물론, 자동화되고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매일 수고롭지만 작은 성실을 요하는 매력이라고 덧붙인다.
다음으로 문구계의 바늘과 실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필기구와 종이를 들 수 있다. 오랜 기간 그야말로 바늘에 실 가듯이 만년필을 사용해온 그는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맞춰나가는 상대로서 만년필을 대한다.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처럼 그가 도구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가 도구에 길들여지며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글씨를 쓰거나 내용을 받아적는 필기(筆記)에 관한 새로운 시선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 펜이나 연필 등 '무엇으로' 쓸까에만 초점을 맞추며 정작 노트나 종이 같이 '어디에' 쓸까라는 점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필기라는 행위가 이뤄질 수 있음에도 말이다. 저자 역시 이 점을 깨닫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볼펜, 사인펜, 만년필을 다양하게 테스트해본 것처럼 여러 종류의 종이에다가 번짐, 필기감, 색깔 구현, 비침 등을 테스트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가지 종이를 사서 그려보고 써보고 인쇄해보며 자기와 궁합이 맞는 종이를 찾는 재미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이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다니, 좀 멋진 일 아닌가. "저는 백색보다 미색 용지, 도공지보단 비도공지, 중량은 100그램 이상의 두터운 용지를 선호합니다"라고 괜히 있어 보이는 말도 해볼 수 있고 말이다.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일상은 한층 더 풍성해진다. 매일 이렇게 무언가를 새로 알아갈 수 있어서 즐겁다.(78쪽)
누군가는 문구인에게 미니멀리즘과 제로웨이스트라는 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당당하게 말한다. 자기를 만들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문구를 소비하고 있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흔히들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와 펜, 자르기 위해서라면 가위나 칼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지만,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구점에서 각양각색으로 진열된 문구류만 놓고봐도 문구 소비에는 '실용성'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필품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들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만 달랑 놓여 있는 팍팍한 느낌의 책상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쓸데없는 것의 힘을 믿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데, 그 어려운 것을 일력이 해내게 한다는 점에 참으로 대단한 문구다(라고 쓰고 올려다보니 나의 일력이 일주일 전에 멈춰 있다. 어서 뜯어야겠다).(104쪽)
(교과서와 문제집 외에는 그 어떠한 책에도 밑줄을 긋지 않는 내가 감히 그럴 수만 있다면) 형광편과 빨간펜으로 밑줄을 몇 번씩이나 긋고 싶을 만큼, 문구인과의 만남에서 가장 놀라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조금 더 행동력이 필요할 때 이른바 '행동하는 문구'들을 일상에 들인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365일 다이어리, 플래너나 스케줄러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침에 뜯을 때마다 차라락 하는 얇은 종이 재질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는 일력의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 마음에 드는 사인펜을 발견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예쁜 노트를 매일 가지고 다니려고 일기를 써왔다는 이야기에서도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지금껏 필요로 구매했던 (피동적인) 문구가 오히려 (능동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문구 소비에는 언제나 좋은 기운과 아이디어가 함께 따라온다고 믿느다. 문구의 가치는 자주 저평가되곤 하지만 사소하고 작은 문방구일지라도 그것이 가져다줄지 모를 효과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작은 문구들의 힘을 믿는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문구를 사서 써봄으로써 돌파구 혹은 해결책을 얻은 적이 많기 때문이다.(132~133쪽)
문구인과 함께 문구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는 동안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문구의 세계를 조금씩 알면 알수록 '디지털 기기인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어떤 면에서는 문구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저자 역시 아이패드와 애플펜슬도 문구인지에 대해 '인간의 기록을 얼마만큼 이끌어낼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문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는데, 궁금한 독자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면 좋을 듯하다.
문구의 세계에서 돌아오니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무실 책상 위와 아이의 책상 위(보다는 아래에 더 널브러져 있는) 문구들이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저자의 말처럼 작은 문구에게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색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이 아이의 색감과 상상력을 키워주고, 포스트잇 한 장과 계산기 한 대가 업무와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주고 있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소소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훗날 아이와 내가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단단한 내일을 맞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