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의 그림들>을 보고 읽고
그림은 시간 속에서 성장한다 그림은 (예술적, 경제적) 가치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완성된다. 그림은 책상머리에서 단번에 그려지지 않는다. 한 세대 한 세대 사람들의 주시와 애무와 평가와 해석을 받으며 조금씩 완성된다.
(8~9쪽, 「서문, 그림으로 만남」中)
1925년 문을 연 북경 고궁박물원의 다른 이름은 자금성(紫禁城)이다. 15세기 명나라 영락제가 남경(南京)에서 북경(당시 북평)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지은 궁전으로 지난 600년간 명, 청 시대의 황제가 살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서 일하며 여러 책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고궁(자금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주용(祝勇)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고궁의 옛 물건』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최근 나무발전소 출판사에서 새로이 '주용의 고궁 시리즈'를 기획하며 『자금성의 물건들』과 <자금성의 그림들>을 선보였다.
옮긴이(신정현 번역가)의 블로그 포스팅에 따르면, '고궁'을 조선의 궁궐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있어서 출판사가 책제목을 자금성으로 바꿨다고 한다. 즉 시리즈의 1권인 『자금성의 물건들』이 『고궁의 옛 물건』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시리즈의 2권인 <자금성의 그림들>은 당초 두 권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최종본은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원서를 검색해본 결과, 중국에서는 『古宮的古物之美2』, 『古宮的古物之美3』 두 권으로 나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1편 격인 『고궁의 옛 물건』을 아주 유익하게 읽었던 나로서는 <자금성의 그림들>도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 www.baidu.com]
책을 받자마자 달뜬 마음으로 차례를 무시한 채 책장을 넘기며 그림 하나를 찾았다. 다행히(혹은 당연히) 그 그림을 만났는데, 그것에 얽힌 이야기(「4장, 장택단의 봄날 여행」)를 읽는 내내 혼란스러운 기분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던 그 작품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북송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수도(이자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무대이자 지금은 개봉(開封)으로 불리는) 변경(卞京)에서의 청명절(淸明節) 풍경을 그림으로 북송의 발달한 경제, 사회 등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디지털로 복원한 작품은 지금 다시 봐도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그림의 제목은 바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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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는 두 개의 위도를 갖는다. (하나는 옆으로 펼쳐지는 폭이다. 이것은 횡단면처럼 북송 변경의 여러 계층,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담고 공기 중에 가득한 향기와 화려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하나는 세로 방향의 위도다. 이것은 강이 세로로 열어젖히는 시간이다. 이 점을 이 글에서 특별히 말할 참이다. 화가는 역사의 횡단면을 전부 끌어다 세로의 시간에 넣었다. 그래서 모든 눈앞의 사물들이 멀어졌다. 충만한 풍성함도 강물에 쓸려갔다. 최초에 강이 만물을 가져온 것처럼 그렇게 쓸려갔다.
(146쪽, 「4장, 장택단의 봄날여행」中)
저자의 시선을 따라 차근차근 살펴 보면 그림을 그린 화가 장택단의 마음과 북송의 현실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까지 가닿게 된다. 이 그림을 제일 먼저 감상한 사람은 황제 휘종(徽宗)이었을 것이다. 그는 글씨(수금체(瘦金體))와 그림(원서 표지 그림인 『서학도(瑞鶴圖)』 등)에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정치보다 예술을 편애하여 결국 북방의 금나라에게 중원을 내주고 포로가 되어 이국땅에서 생을 마침으로써 중국 예술사와 정치사에서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제국의 화가로서 황제가 그림 속에 숨겨둔 암호(암시)를 발견하여 올바른 정치를 펼치기를 기대했던 장택단. 그림 속 화려하고 큰 도시의 모습에만 눈길을 보내며 태평성세가 영원하기만을 바랐던 휘종. 그렇게 동상이몽을 한 두 사람의 결말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과 그들의 저작을 소멸시켜 나가는 휘종을 곁에서 지켜보던 장택단은 '파본과 쓰레기가 된 붓글씨 작품 중 하나를 주워 수레에 실려가는 시체를 덮어(156쪽)'주는 모습을 『청명상하도』에 은밀하게 그렸으나 휘종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파국의 길을 걸어간 것이었다.
늦게라도 그가 번화한 도시 속 사람과 건축물에서 눈길을 거두어 그림 전체를 유유히 흐르는 강에 주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자는 휘종이 강물의 흐름이 상징하는 세월과 그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강은 곧 시간과 다르지 않기에 멈출 수 없을 뿐더러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그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물은 현대인의 눈과 마음에 흐르며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제 우리보다 훨씬 앞서 휘종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사람을 만나보려 한다.
'그' 역시 휘종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애정한 황제였지만 휘종과 달리 정치와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평생을 바쳤고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바로 청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건륭제다. 스스로 '천고(千古)의 황제'라고 생각한 그는 여섯 차례에 걸쳐 남순(南巡, 강남 지역 순회)하였다. 또한 매사에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한 그는 자신만의 까다로운 원칙에 따라 전국에서 진귀한 예술품들을 모으기도 했다. 건륭은 남순 과정에서 백성의 고통을 체험하며 민심을 살피고, 개인적 만족보다 도덕적인 이상을 담는 그릇으로서 기능하도록 자신의 소장품을 관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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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건륭을 주제로 한 두 그림에 대하여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다. 『건륭남순도(乾隆南巡圖)』가 빼어난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남순이 지방경제에 큰 부담을 준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청명상하도』처럼 보통사람들의 삶과 그 원형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황제 한 사람만을 돋보이게 하는 구도로 이뤄진 그림이라고 비평한다. 반면 『시일시이도(是一是二圖)』 앞에서는 건륭의 내면과 심리를 헤아려보며 꽤 재미있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그림들을 보면 건륭이 단지 물건에 대한 애착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점은 송 휘종과 비슷하다.) 심각한 나르시시즘 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림의 대상이 되었고, 궁정의 그림에서 계속 '신스틸러'가 되었고, 같은 그림에 반복적으로 출현해 자기 모습이 사라지지 않게 했다. 『시일시이도』의 제목 시에 쓴 것처럼 '하나이면서 둘이라 가깝지고 멀지도 않았다.'
(587쪽, 「15장, 마주보기」中)
그림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건륭과 벽에 걸린 그의 초상화가 함께 그려져 있다. 마치 거울에 비춘 듯 똑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주의를 기울이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역사적 단서들을 하나씩 맞춰가며 건륭이 가진 또 다른 자아를 유추해나가는 저자에게서 미술사학가다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는 정치와 예술에 진심이었던 건륭이 은퇴 후 정치적 성년 건륭에서 벗어나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한 소년 건륭이라는 자아를 되찾고 싶은 욕구도 늘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욕망들과 그것들을 거의 모두 실현시킨, 그야말로 끝판왕의 삶을 살다간 그에게 저자는 중국 작가 스테셩이 저서 나와 디탄에서 한 말을 들려주고 싶어한다. 젊은 시절부터 걷지 못했던 스테셩의 눈에는 총알탄 사나이 칼 루이스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올림픽 경기에서 벤 존슨에게 패배한 칼 루이스의 눈빛을 목격한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다시 내리게 된다. 수많은 시련과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아예 달리지 못하는 것과 더 빨리 달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둘 다 같은 불행을 의미한다는 그의 말에 건륭뿐만 아니라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림을 감상하는 데 정해진 법은 없지만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명한 무명의 화가들이 화폭에 담아낸 그림들을 보면서 동진(東晉)에서부터 청(淸)까지의 중국 회회사는 물론 중국 역사를 더욱 다채롭게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저자는 그림 자체의 형식미를 이루는 요소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알려준다. 그 중에서 북송 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세로로 긴 족자나 쪽병풍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옆으로 길게 말면서 보는 '두루마리'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청명상하도』와 『강희남순도』도 두루마리에 그려진 그림으로 길이가 각각 5m, 8m가 넘는데, 고궁박물원에서도 두루마리 작품들을 펼쳐서 전시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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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신부도(洛神賦圖)』는 그래서 『낙신부(洛神賦)』가 아니다. 이 그림 두루마리는 모든 시간의 흐름, 번영과 멸망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보여준다. 끝이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로 마음으로 그리워하면 모든 헤어진 사람들이 언젠가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39쪽, 「1장, 약속이라도 한 듯이」中)
『낙신부도』는 4세기경 중국 동진(東晋)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두루마리 그림으로, 화가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중국그림인 까닭에 그가 '중국 회화사의 첫 번째 화가'로 불린다는 점과 함께, 조조의 아들 중 하나이자 문학가인 조식(曺植)이 쓴 『낙신부』를 바탕으로 각색한 그림이라는 사실이 퍽 흥미롭다. 『낙신부』는 형인 조비(曺丕)에게 쫓겨난 조식이 경성에서 견성으로 가는 길에 낙하(洛河)에서 (복희의 여자로 낙수에 빠져 죽은 후 신이 되었다는) 낙신(洛神)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고뇌와 안타까움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1장, 약속이라도 한 듯이」의 말미에 『낙신부도』는 『낙신부』가 아니라고 결론짓는 저자가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바로 '두루마리'의 물성이다. 두루마리를 펼치고 접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옛 중국사람들이 그림을 보는 방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볼 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남과 헤어짐을 겪게 된다.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본다면 시간을 되돌려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기(禮記)』의 한 문장을 가져와 말한다. "일어나면 끝이 시작되고, 시작하면 곧 끝이 오고, 끝나면 곧 일어나니 끝이 곧 시작"이라고.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역사가 카(E.H. Carr)의 말을 빌려 두루마리에는 '영원히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고 말하는 저자를 보면서 어쩌면 <자금성의 그림들>도 일종의 두루마리에 쓰여진 책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두루마리를 무시로 펴고 말고 다시 펴면 어느날은 옛 그림이 나에게, 또 다른 날은 내가 그림에게 말을 건네게 될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영감과 위로를 안겨줄지 사뭇 기대가 된다. 오래 전 누군가의 손에서 다른 이의 손으로 전해졌던 두루마리처럼 <자금성의 그림들>이 당신의 손에도 쥐어지기를 바란다.
조맹부(趙孟?)는 '글과 그림이 본래 같은 데서 왔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선(線)의 예술인 붓글씨와 그림의 원천을 밝히고, 이 둘이 오랜 문명의 세월 동안 서로 친밀했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것도 설명했다. 또한 이 둘의 미래의 길도 보여주었는데 특히 그림은 본질적으로는 (붓글씨처럼) 뜻을 그리는 것이지 현실을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302쪽, 「8장, 빈산」中)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