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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아이

[도서] 죽이고 싶은 아이

이꽃님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한창 미투, 빚투, 고발 용어가 사회를 휩쓸다가 최근에는 '학폭'이라는 용어가 돌아 다닌다. 굉장히 좋은 현상이다. '학폭'은 절대 미화돼서는 안된다. 공소시효도 짧아서는 안 된다. '학폭'은 정말 극악하다. 여기는 당연히 폭행, 추행, 절도, 사기, 모욕 등을 함께 동반한다. 학폭은 범죄 의식이 결여된 미완성 인간을 사회로 양성하여 내보내는 시작점이다. 선량한 이를 괴롭히는 것이 힘의 논리라고 믿게 한다.

'위세과시'를 다른 능력으로 할 자신이 없는 이들이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위세과시'를 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식을 학창시절에 만들고 사회로 내보내면, 그 사회는 원시사회가 된다. 국어, 수학, 영어를 완성하는 것보다 사회성을 완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교육학 용어로 교육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다. 그깟 국, 영, 수 등급이나 구분하는 과정이 아니다.

학폭이 악질인 이유는 '죄의식 결여' 때문이다. 졸업을 끝으로 가해자 스스로 자체 공소시효를 소멸한다. 적당히 '낄낄' 거리며 즐기다가, 졸업하면 혼자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한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이미 과거라고 생각한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단순히 '서열', '인간관계', '교우관계' 정도로 정의해 버린다. 당연하게 미친 증상이며 '범죄'다.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 범죄의 대부분은 '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 결여'라는 무지에서 시작한다. 사이코패스와 다르게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소시오패스'는 후천적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이들은 역시나 '교육'된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물론 애들은 그럴수도 있다. 6살 아이가 5살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을 수도 있고, 7살 아이가 6살 아이를 때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보자마자 형사소송법을 들이밀며 입건 수사할 수는 없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은 인간을 영아기부터 노년기까지 8단계로 나눠 발달한다고 봤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7살에는 죄의식을 갖게 되며 12살 까지는 열등감을 갖고 청소년기에는 역할과 정체성을 확립한다.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면 7살인 어린 아이는 마트의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어가지 않고 12살된 아이는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애들이 그럴 수 있지'는 지극히 부모 생각이다.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아이를 잠재우고 조용한 밤에 '밀리의 서재'로 읽었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는데, 나름 재밌게 읽었다. 굳이 '청소년 책'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같은 소재의 드라마 '더 글로리'가 19세인 것을 보면 충분히 성인도 즐길만한 컨텐츠다. 가만히 누워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소설은 쉽게 읽히지만 점차 반전의 반전을 준다.

과연 '선과 악'은 무엇이며, 죄와 벌'은 무엇이고, 진실과 믿음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진다. 잠에 들기 전에는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다. 너무 무겁고 긴 소설은 자기 전에 읽기 부적합하다. 시작을 하면 늦게까지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잠들기 전에 읽기 시작하고 아침에 눈을 뜨고 완독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두 친구의 관계에 대한 의심.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와의 관계. 어른과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의 차이. 미디어와 학교의 관점. 단순히 학교 폭력 정도를 담은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인데, 마지막 국민학교 시대를 다녔던 나로써 학교는 야생과 닮아 보였다. 당연히 교육과 사회화가 덜 된 어린 아이들이 집합이기에 '성인'들의 정돈된 사회와는 달랐다. 다만 나에게 인상 깊었던 모습은 '학교'의 모습이다. 그 시대는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특이했고 야만적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양말에 나무 가시가 박히는 마룻바닥이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책상을 모두 뒤로 밀고 앉아서 8살, 9살 되는 아이들이 양초와 마른 걸레로 왁스질을 했다.

한참하고나면 무릎이 반들 반들해지고 손 끝이 빨갛게 됐는데, 이 시간에 놀다가 걸리면 성인 남성의 선생님이 가차없이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치셨다. 쓰레기를 버리러 소각장을 가면 학교 수위 아저씨는 쓰레기통에서 플라스틱 병이 나왔다며, 뒷통수를 때리거나 뺨을 후려 갈겼다. 얼핏 잘 기억은 안나지만 의자를 집어 던지시던 선생님도 계셨고 뺨을 맞는 건 그닥 불평할 사항도 아니었다. 한번은 놀림을 받던 친구가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께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고자질도 나쁜 거다.'라며 크게 혼내시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지금은 되려 교권이 바닥이라, 선생님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에 사회가 공감하는 분위기지만, 그때의 어른들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당연히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따돌림'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하다 싶은 상황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침묵을 택했다. 불필요한 위험을 스스로 떠안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를 포함하여 당시 침묵하던 친구들도 그때를 돌이키면, 자신들의 모습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 정의롭게 나서지 못했을까.

학교폭력은 고로, 가해자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트라우마를 만들고, 혼자 즐거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지극히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이기적인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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