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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눈이 내 얼굴을

[도서]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안태운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4점

   ... 생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랜 시간 그렇게 생각하며 띄엄띄엄 살았다. 지금은 생략할 수 없어서 불행하다. 촘촘한 시간의 그물에 사로잡혔다. 이쪽의 시간에서 저쪽의 시간으로 수시로 넘어가고 돌아오는 호사는 잊은 지 오래다. 생략할 수 없으니 많은 능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의 온기도 사라졌다. 호호 불어가며 발갛게 익은 기억의 껍질 벗겨내던 용기도 한껏 줄어들었다.


  “충혈된 밤으로 새가 / 번지고 그 위로 / 떨어지는 이파리 / 몰래 버려둔 횃불에서 / 미끄러져 나오는 해명들” - <확성의 밤> 중


  목이 잘린 시체의 머리 부분과 나머지 부분 중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머리 부분...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손을 번쩍 든다. 성큼성큼 탁자 앞으로 나가 고개 숙인 책상들을 둘러본다. 나는 소리친다. 내가 힘껏 외치자 자판에 불이 들어오고 저장되어 있던 번호로 신호가 날아간다. 새들이 그 옆에서 함께 날아간다. 그렇게 밤하늘을 쉬지 않고 도착하는 곳은 머리 부분과 나머지 부분 중 결국 머리 부분일 테니까...


   베네수엘라어


  너는 외국어로 말한다 아무런 뜻처럼 나는 외국어로 대답하고 너는 풍겨 온다 나는 부분을 건너뛴다 노래하듯이 차양 밖으로 눈이 흩날린다 외국어처럼 너는 내게 어질러져 있다 혀를 품듯이 그러나 혀를 포기하고 말은 먼 방향으로 진행된다 눈처럼 흩어진다 외국어를 하듯이 무언가 이월되는 기분이 지속된다 나는 말을 할수록 그것을 잃어버리고 그러면 당신은 자주 고개를 끄덕입니다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지피자 눈이 녹아들었다


  뭐랄까, ... 이런 느낌이라고 일단 적어 놓고 본다. 팻말은 세워졌지만 아무런 감각이 없다. 끓고 있는 우유와도 같은 체념,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포착한 뒤의 어떤 눈빛이나 손짓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아무런 감상이 없다.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풍요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끓고 있는 우유, 적당한 온기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파괴하지 않는 정도의 어떤 뜬금없음...


   밤을 몰라보게 되어서


  공들여 든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밤에는 털이 날리고
  등 굽은 동물이 되어가고
  회생한 얼굴을 보았지만
  다만 보고 싶은 것은
  꿈에 찔려서 도로 능으로 들어가는 얼굴이었고
  털은 자란다
  죽은 야경을 열어 환기를 하는 사이
  얼굴에서는 몸이 드러나고
  눈은 녹아 땅을 질게 하고
  밤이 여읜 것
  다만 밤이 여읜 것에 대해서
  향을 피우고
  잠든 동물의 얼굴이 되어 가고
  밤을 몰라보게 되어서


  결여된 맥락으로 가득한 밤이 지나가는 중이다. 딸랑딸랑 소리 들리기 전에, 차단기 올라가기 전에 부리나케 움직이려고 한다. 저기 나의 가장 아래 서랍에서 꺼낸, 오래된 기척이 잔뜩 서려 있는, 일종의 러플이라고 할 수도 있을법한 무언가가 펄럭인다. 기억이 거울처럼 연약하여 혹은 그저 거울에 비친 기억일 뿐이어서 간혹 왜곡되고 변형된다. 밤의 도로에서 기억은 거울이라는 보도석으로 구분된다, 이쪽과 저쪽으로...


   감은 눈으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진다. 보이지 않는 눈앞에서 그러나 내가 만진 것들은 다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내 손을 멈추게 하고 손은 어둠에 익숙해진다. 걷고 난 후의 일들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짚이 타고 있다. 눈 뜨면 꿈과 함께 내쳐졌다.


  다리가 세 개인 의자, 아니 그러니까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네 개의 다리 중 하나가 사라져, 이제 다리가 세 개인 의자가 되어 버린 네 개의 다리였던 의자에 앉아 모든 걸 떠올린다. 인공의 감정, 안개 속의 섬처럼 허위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개의 팔과 다리로 겨우겨우 떠오르는 전투적인 영법... 아내는 오늘 꿈을 꾸었다는데, 아주 아주 높은 곳에서 아주 아주 어린 새끼 고양이를 떨어뜨리기 직전에 깨어났다고 한다.

 


안태운 / 감은 눈이 내 얼굴을 / 민음사 / 110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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