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작은 세계에 균열이 생길 때,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나아간다. 균열은 때로 빅뱅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거나, 간질거리는 부스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태동하기 시작한 작은 우주들은 끊임없이 다른 우주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때로는 무서워하기도 하고 끌리기도 하며 여러 세계의 일부를 흡수한다. 그 과정에서 접점이 없던 세계가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를 닮기도 하고, 함께 꿈꾸었던 다른 세계를 기억하곤 그려내기도 하며, 앞서간 다른 세계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랑했던 것들을 닮은 세계를,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러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은 끝없이 분열하는 자가 증식 나노봇이 폭발하며 발생한 더스트 폴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죽음의 문턱까지 내몬 시대를 지나, 재건된 세계에서 그 시대의 역사를 양분 삼아 자라난 식물 모스바나의 흔적을 쫓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스바나의 흔적 속에서, 끔찍한 종말의 시대에 타인과 긴밀히 맞부딪히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안전한 돔 안에서 살아간 권력자들이나 국제 협의기구의 영웅적 활동보다, 더스트 시대의 변두리에서 살아간 개인들의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들이 살아가야만 했던 죽음뿐인 환경을 완벽히 상상해 내기란 어렵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마음과 말, 그리고 희망은 우리의 삶과도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화려한 영웅담이나 신화보다도 더 우리 마음을 깊이 파고든다.
어렸을 적 이웃 할머니의 정원에서 본 푸른빛을 내는 식물에 이끌리는 아영과, 더스트 시대 속 프림 빌리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아마리 나오미 자매, 그리고 온실 속의 사이보그 식물학자 레이첼과 그의 기계 정비공 지수의 이야기는 아주 잘 짜인 짜임새로 모스바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레이첼과 지수 그리고 프림 빌리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스트 시대에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준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세계가 요동치고, 찢어지고, 끝내 상처투성이인 채로 다시 활력을 찾게 해준 힘은 바로 타인과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타인과의 충돌이 전부 긍정적인 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초엽 작가의 섬세하고 위태로운 감정선 덕분에, 등장인물의 상처는 곧 독자의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은 지수와 레이첼이 서로를 기만한 사실이 드러나 둘의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했던 프림 빌리지가 불타는 과정을 지나며 절정에 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갈 수밖에 없다. 모스바나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숭고한 이상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식물 하나가 지구를 살릴 수 있었던 건 세상과 단절될 뻔한 사람들의 마음이 부딪히며 깨지고 퍼져 나오는 과정이, 프림 빌리지와 언덕 위 온실에 살던 모든 이들이 각자의 문을 열고 관계를 지속해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스트는 코로나를 많이 닮았다.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사회에 불신과 불화를 퍼뜨리는 종말의 씨앗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기에, 우리는 모스바나와 온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견고한 돔의 벽 뒤에 숨어 있기를 원할 수 있다. 더스트가 세상을 덮었을 때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돔을 차례차례 무너뜨리던 더스트가 끝내 집어삼키지 못한 지구상의 마지막 숲은 돔 바깥에서 발견되었다. 그 숲에서는 사람들의 만남과 교류가 이어졌고, 그들의 공동체에서 태어난 모스바나가 있어 지구가 한꺼풀 정화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을 닫고 끝을 고하고 싶은 세상에서조차도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 끝이 무너진 돔일지, 프림 빌리지와 지구 끝의 온실일지는,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