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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도서]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저/하윤숙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부 남자들이 차지하고, 그들을 돋보이게 만들면 그만이었던 납작한 트로피 여자들은 점차 목소리를 내어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현실의 여성들 또한 더욱 다양한 여자들의 모습을 다양한 매체 속에서 보고자 하는 열망-혹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깨닫고 있다. 덕분에 그간 누리지 못했던 수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상상의 세계 속 세상을 구할 능력 있는 영웅이 여성으로 그려지는 동시에, 현실의 무거운 압박에 해소되지 못하던 여성들의 고통과 감정이 종이 위 문장을 통해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야말로 여성 중심 서사의 풍년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자신의 권리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해로운 목소리와 이로운 목소리를 나누는 흐름이 등장했다.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아가 젠더가 억압한 태초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모든 여성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는 허스토리가 아니다. 역사는 남성들의 시각으로 쓰였으며 고되고 오랜 투쟁 끝에 교육 기회를 얻었음에도 여자들이 보고 읽고 학습할 대상은 역사서에 남겨진 훌륭한-그들이 여성혐오적인 인생관을 가진 것과는 상관없이-남성들뿐이었다. 또는, 남성들이 힘을 쥔 사회 속에서 살아남고자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적인 사회에 완벽히 혹은 일부 녹아들어 가부장적 시선을 가지게 된 여자들도 있으며, 일반적인 남성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여성들을 평가하는 여자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여자들을 위한 말을 골라내야 하는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여자, 남자의 편에 선 여자로 편을 갈라내는 것보다 시급한 건 여성 개개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다. 그런 점에서, 버나딘 에버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각기 다채로운 삶을 가진 열두 명 유색 인종 여자의 삶을 들려주며 우리가 간과하는 현실과 그의 다양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쉽게 폭력적이고 빈곤한 현실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나아가야 하는 유색 인종 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효과적으로 상기시켜준다. 반면, 레즈비언 간의 사랑이든, 남자와 평생을 함께하는 삶이든, 아이를 가진 삶이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실어내어 모든 주제를 입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한다(물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느라 남자와의 결혼 얘기는 불륜, 폭력, 억압 등 대부분 불행한 내용밖에 없다). 공동체의 이념을 위해 여성을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 보아 가부장제의 폐지와 여성 인권의 진취를 추구했다면, 주변 여성들의 개인적인 삶과 그 역사에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애정 어린 시선을 함께 추구하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이 책은 파격적인 형식을 통해 독자를 열두 가지 삶에 맞닿을 수 있도록 끌어당긴다. 쉼표만을 사용하여 물 흐르듯이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문체는 등장인물의 피부에 새겨진 삶의 결과 그 속을 흐르는 감정의 물살에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한다. 작가의 극단 제작자로서의 경력이 돋보이는 듯한 문장 구조는 강렬하거나 사소한 감정마저 생동감 넘치게 전달하여, 독자가 종이의 한계를 넘어선 이입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느끼는 어색함은 한두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되레 책장을 빠르게 넘기도록 돕는 부스터로 작용한다.

 

  이런 재미난 특징 외에도,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구조 또한 큰 재미 요소로 작용한다. 책 속 여자들의 이야기는 각자 분리된 영역에서 완결성을 가지고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담아내고 있음에도, 작거나 큰 접점을 가지며 서로의 삶에 다양한 영향을 준다.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는 때로 파국을 맞이하기도, 화합을 가져오기도 하며, 어느 순간 가까이 겹쳤다 또 다른 순간 멀리 분기하며 나아간다. 이러한 관계도 한 쪽의 입장만이 아닌, 다른 쪽의 입장 혹은 제삼자의 입장을 함께 그려내는 방식을 통해, 저자는 기존 미디어에서 다루던 납작한 여자들의 관계를 효과적으로(그리고 입체적으로) 펼쳐냈다. 그들이 연결된 흔적을 찾으며 읽는 것이 이 책의 재미난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인생을 여러 번 들여다볼수록 그 속의 색다른 껍질을 마주할 수 있듯이, 에버리스토의 책 또한 여러 번 읽을수록 인물의 관계와 감정을 더 촘촘히 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을 때, 우리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태피스트리를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열두 명의 여자가 가진 색색깔의 실이 교차되고 어우러지며 그려진 태피스트리를. 그럼으로써 우리가 세상과 여자를 보는 눈도, 더 다양한 색깔을 띠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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