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판타지 소설계의 새로운 장막을 열었다는 ‘네버무어’ 1권을 놓고, 여러 인터넷 서점 앱을 들락거리며 줄거리와 별점, 그리고 후기를 거듭 확인하며 망설였다. 어린 시절 해리 포터를 읽고 호그와트 입학 편지가 날아들 날만을 기다렸던 것보다 더 강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모리건의 이야기에 발을 내디딘 것을 후회할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열어 그 세계에 온전히 몰입하는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고 값지지만, 그러한 몰입에 대한 기대가 외면되는 순간 느낄 낭패감도 잘 알았던 탓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네버무어 1부를 빌려오고도 한동안 책상 위에 얹어놓고는 까먹었다.
그런데 웬걸, 어디 한 번 읽어나 볼까? 하고 펼친 책장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넘어갈 줄은. 오묘한 세상이었다. 상공에 펼쳐진 거대한 레일에 우산을 걸고 곳곳을 누비는 정신 나간 전철역과,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매일같이 제 몸을 바꾸는 호텔, 그리고 밝고 환한 마법 학교가 아닌 음험하고 비밀이 많은 특별한 협회까지. 지금껏 마주해본 적 없는 생소한 세상임에도 거부감 하나 없이 금세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타운센드가 네버무어가 마치 실재하는 공간인 것처럼 촘촘하고 정교하게,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묘사한 덕분이다. 주인공 모리건이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뿌리를 내린 네버무어는 나의 망설임을 비웃듯 빠르게 실체로 다가왔고, 이야기가 끝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네버모어」 - 「원더스미스」 - 「할로우폭스」, 총 세 권으로 이루어진 모리건 크로우의 이야기는 작가 타운센드가 10여 년간 공을 들여 엮은 내용이다. 그만큼 책을 펼쳐 마주하는 세계는 자세하고 정교하며 친절하기까지 해서, 아무리 고리타분한 틀에 찍혀 나온 사람이라 해도 금방 모리건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 함께 달리게 된다. 작가의 섬세하고 은유적인 표현 덕에 모리건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더욱 풍성하게 자라나고 다양한 색으로 물든다. 그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각기 다른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비기’나 협회의 회원이 갖는 교육 기회와 가능성에 대한 소재는 신선하면서도 매혹적이고, 인물들의 통통 튀는 대화 또한 우리를 쉴 새 없이 웃게 만든다. 정말로 소재의 신선함과 재미, 그리고 문장력 전부를 가진 팔방미인 같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네버무어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던 최고의 이유를 하나 골라보자면, 작가가 그린 세계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들고 싶다.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성격이 다채롭고 입체적이라 현실적이라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은 오히려 냉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이다. 모리건은 저주받은 아이로 살아오며 받았던 수많은 비난과 책임 전가의 기억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주변의 변화에 불안해하며, 그의 보호자 주피터 노스는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내며 유쾌하기까지 한 만능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숨기는 것이 많아 모리건을 불안하게 한다. 모리건이 네버무어의 일원으로 거듭나며 거쳐가는 많은 인연은 악의적인 면모나 온전한 선역의 모습만을 드러내지 않고, 주인공과의 교류 속에서 입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인 모리건도 기존의 정의로운 영웅 역과는 조금 다른데, 그러한 점에서 독자가 더욱 친밀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리건의 매력은 마냥 선하지만은 않고, 두려움을 모르진 않지만 고집은 세며, 친구와 사랑을 갈구하나 상처 때문에 걱정이 많고 불안한, 누구든지 가지고 있을 법한 섬세하고 위태로운 자아상에서 온다. 그런 모리건이 결국 스스로를 믿게 되고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하게 되는 순간, 독자들은 쾌감 내지는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아직은 모를지라도 한마음으로 응원을 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인 원더가 주는 경이로운 비현실적 감각은 네버무어의 황홀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모리건이 지옥 같은 공화국을 탈출해 기이하고 마법적인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는 호텔 듀칼리온에 도착하기까지, 지상을 달리는 지하철역이 아닌, 공중을 휘젓고 다니는 브롤리 레인이나, 모든 것이 조금 더 그런 원드러스 협회 내부 프라우드풋 하우스의 통통 튀는 구조는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가 생동할 수 있도록 한다. 또, 협회와 단 9명의 형제자매라는 이야기는 매력적인 특권과 진정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도 모리건과 함께 그 촘촘하고 끈끈한 관계 속으로 떨어지고자 갈망하게 한다.
다만 첫 번째 이야기부터 마지막까지 빠른 전개를 통해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전달했지만, 모리건의 이야기가 총 3부작으로 마무리되었음에도 독자들이 궁금해할 내용이 여전히 많다는 점은 아쉬웠다.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중심 내용을 채워 넣고 곁가지를 깔끔히 친 것만 같은 느낌이다. 네버무어의 세계관이 매력적으로 잘 짜여 있고, 작가가 매력적인, 그래서 더욱 그 내면을 알고 싶은 인물을 잘 그려냈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어쩌면 원드러스 협회 관련 이야기나 네버무어 시리즈의 악역의 삶이 외전으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싶다. (악역에게 정을 주기란 싫지만, 그 악역이 자신의 이야기를 꽁꽁 숨기고 있다면 어쩔 수가 없는 법이다.)
아무튼, 정말 예측하기 힘들었던 모리건의 이야기를 따라 달려오는 근 4일은 정말 행복했다. 호그와트라는 마법 세계를 처음 접하고 나서 해리와 함께 9와4분의3 승강장으로 향하는 벽을 뚫고자 했다면, 이제는 눈을 뜨고 일어난 방이 듀칼리온 호텔의 8층의 방이 되어, 침대는 포근한 거미줄로 변하고 벽걸이 장식품이 살아 움직이다가, 벽 어딘가에 나만의 색깔을 가진 문과 금빛으로 빛나는 인장이 손가락을 간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갈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어딘가가 조금 더 특별해서, 언젠가 모든 것이 조금 더 신비한 원드러스 협회로 향하는 문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소중히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