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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도서] 키르케

매들린 밀러 저/이은선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영웅이 등장한다. 지금의 20대라면 대부분 어렸을 적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닳도록 읽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남아있는 신화 속 영웅들은 대부분 남성적 존재들이다. 대부분의 요정은 제우스에 의해 겁탈당하는 위치인 나약한 존재로 묘사되고, 헤라클레스나 오디세우스 같은 찬란한 인간 영웅 중에 여성은 없다.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나, 사냥과 달의 신 아르테미스 등이 역동적이고 시퍼런 날붙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여자아이들이 몰입할 영웅적 인물은 남자아이들이 몰입할 대상보다 그 수가 현저히 적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신화 속 가치가 폄하되거나 악한 인물로 치부된 대상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남편을 기다리는 온화하고 인내심 깊은 여인으로 묘사된 페넬로페의 내막을 그려낸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페>나, 사랑을 위해 아버지와 자식을 죽인 메데이아의 캐릭터성을 따서 냉정하고 강인한 면모를 가진 인물을 그려낸 네이버 웹툰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가 있다. 그리고 여기, <키르케>에서 다시 그려내고 있는 아이아이에 섬의 마녀가 그러하다.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는 신화의 변두리에 장식품처럼 서 있던 인물을 무대 중앙에 세운다. 앞서 말한 메두사나 메데이아는 서사나 결말의 충격이 커 끝내 악인처럼 비추어졌더라도 뇌리에 강하게 기억되지만, 키르케는 크게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다.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오디세우스의 여정 속에 스치듯 등장한 아이아이에 섬의 주인이라는 점,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부하를 돼지로 둔갑시켰다 결국 그의 재치에 설득되어 그를 도와주었다는 점 정도일 뿐이다. 그마저도 10여 년간 이어진 표류기를 마무리하러 배를 타고 떠난 영웅의 발자취에 금세 묻힌다. 그러나 매들린의 <키르케>는 주목받지 못한 인물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 내려가며 새로운 조명을 밝힌다. 신화의 영웅이던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삶에서 한순간의 추억 정도로 묘사되고, 대신 키르케의 삶을 관통하는 좌절과 열망의 이야기들이 훨씬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많은 해석이 나와 완성된 기존의 신화 속에서, 나 여기 있노라 외치며 꿈틀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식어버린 이야기의 열기를 다시금 들끓게 하고 그 깊이를 확장한다.

 

  다만 이야기 속에서 아쉬운 부분이 드문드문 있었다. 키르케가 기존의 신화에서 밟은 행보가 있기에 전체적인 서사를 놔두고 생략된 이야기만을 뒤틀 수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의 마음을 묘사하는 대부분이 사랑에 치우쳐 있어 아쉬웠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이 사랑한 인간 어부에서, 원할 때만 몸을 섞는 헤르메스, 그리고 계략과 지성에 매혹되어 함께한 오디세우스를 지나, 키르케를 존중하는 텔레마코스까지. 결국 키르케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속했던 신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의 세상으로 이동하는데, 인간의 삶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 그가 사랑한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에 편입되기를 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야기 내내 적극적인 반항보다 소극적인 분노를 선택했기에, 나는 가끔 키르케의 동생에게 몰입했다. 동생은 잔인했으며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했으나, 넘치는 분과 힘을 속으로 삭이기보다 바깥으로 시원하게 표출했다. 키르케는 자신을 둘러싼 불합리한 세상에 분노를 느끼지만, 그것을 숨기고 감추며 대신 사랑과 애정을 갈구한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제 발로 세상을 딛지만, 세상을 딛으며 풀어낸 소망이 그간의 아픔과 답답함을 씻어내기엔 너무 자그마한 탓에 영 속 시원하지가 않다.

 

  그러나 위와 같은 아쉬움에도, <키르케>는 여전히 잘 짜인 소설이다. 페넬로페와 키르케의 인연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으로 묘사한 점이 마음에 든다. 특히 기존 신화에서 페넬로페의 끝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키르케의 의지를 이어받아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 심장을 뛰게 한다. 또 신화에서 영웅으로 등장하던 여러 남성 주연이 여성 조연의 시선에서는 다르게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어 재미있다. 영웅은 사랑에 먼 눈을 통해 볼 때 빛이 날 뿐이지, 환상이 걷히고 그를 둘러싼 책임과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의외의 추함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재치있게 그려냈다. 특히 예전에 오디세우스의 모험기를 참 좋아했던 독자로써, 성별의 벽을 딛고 오디세우스에게 몰입해 전설을 칭송하던 과거를 떠나보내고 페넬로페나 텔레마코스, 텔레노고스의 입장에서 그를 보니 참... 색달랐다. 신화의 많은 영웅의 위상이 이와 같이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하다(그러나 이미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 멈출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눈을 마주친 상대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괴물로 묘사된 '메두사'나, 베 짜는 능력을 믿고 자만하다 거미가 되어버린 '아라크네' 등의, 수많은 비운의 조연들도 재조명되었으면 한다. 신화도 사람이 만든 발명품이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잊힌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에 발맞춰 숨겨둔 이야기를 내밀 줄 알아야 한다. 말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이기고, 끝까지 기록하는 사람이 이긴다. 이제는 커튼에 가려진 조연이 걸어 나와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줄 시기이고, 우리는 읽을거리가 더욱 풍성해짐에 감사하며,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주면 된다. 이번에는 '키르케'였지만, 다음에는 어떤 얼굴일까? 정말로,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무척이나 기대된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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