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SF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SF는 얼핏 보아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의 근간을 파고들어 원인과 논리를 탐구하는 반면, 판타지는 그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가닥으로 받아들여 그 신비함을 유지한다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한 점에서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는 SF보다는 판타지, 판타지보다는 환상문학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상상을 펼치되 세계가 흘러가는 방식에 의문을 두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괴이한 사건을 따라가는 것에 집중한다. 일련의 사건들은 <해리포터>나 <네버무어> 시리즈의 밝고 마법 같은 그림보다는 <푸른 수염>이나 <천일야화> 등의 음습하고 기이한 그림과 어울린다. 교훈이나 희망을 주기 위한 스토리텔링이라기보다는, 기괴한 분위기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이야기 보따리 같다.
그렇기에 하나의 이야기가 끝이 나도, 그 결말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간단히 재단할 수 없다.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며 복합적이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은 이리저리 치여 지치거나 위안받기 때문이다. 단순히 통쾌한 복수극은 없고, 단순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 이야기도 없고, 단순히 끝나는 악몽도 없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이 나면 얼마간 멍하니 앉아 내용을 곱씹고 내가 마주한 결말이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그날의 감정에 따라, 읽을 때마다 다양한 결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집어 들 날이 기대된다.
나중의 재미를 위해, 지금의 감상을 아래 짤막히 기록으로 남겨본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몸하다'이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그리고 '흉터'이다. '몸하다'는 사건의 발생부터 결말까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피임약을 너무 오래 복용해서 임신을 했다는 정신나간 발상이 마음에 들었을 뿐더러, 작가가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면모를 너무나도 시니컬하게 녹여낸 탓이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천일야화>나 <신드바드> 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모래사막 위의 설화 같아 매력적이었다(이 이야기는 <저주토끼>의 수많은 단편 중 드물게 교훈을 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 교훈은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유용한 내용임은 틀림없다). '흉터'는 아마 이 책에서 가장 긴 단편일 텐데, 주인공을 둘러싼 마을과 괴물의 이야기가 명쾌히 설명되지 않아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둔 점이 이야기를 더욱 매혹적으로 읽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