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본인의 성격에 관해 고찰하다 이런 생각을 한다. 여자로 태어나 나서지 않고 뒤에서 보조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살아온 나도 지금 기질이 이러한데, 남자로 태어나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것이 마땅한 위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났다면 정말 고집불통에 독단적이고 공감 못하는 위선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위와 같은 가정을 붙여 최악의 경우를 상상할 수 있는 건,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자란다는 건 사회적인 약자의 위치와 생활 태도를 학습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일 테다.
보통 여자들은 강자로서 저지를 수 있는 언행보다 항상 덜 폭력적이고 덜 노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건 마음속 어디에선가 소리치는, '여자는 저렇게 행동하지 않아!' 하는 목소리 때문이다. 소설 속 여자 엄주용과 남자 엄주용이 같은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다른 성장을 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고, 그렇게 보면 사실상 둘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없다. 염색체만 다르고 모든 조건이 동일한 아이가 둘 태어나도, 성별이 확인된 후부터 서로에게 기대되는 역할 수행이나 주어지는 옷의 색깔, 장난감의 종류 등이 다르게 주어질 텐데. 인격 형성의 많은 부분은 그런 사소한 환경에서부터 시작하고, 그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그냥 눈을 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위에서 살짝 말했지만, 설재인 작가의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은 여자 엄주용이 우연찮게 막걸리를 마시다 남자 엄주용이 살고 있는 세계로 넘어가며 발생하는 여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통 도플갱어 취급받는 두 인물이 한 세계에 공존하게 되면 각자의 세계가 가지고 있던 설정들이 뒤엉키기 마련인데, 이를 매끄럽게 풀어내고, 더 나아가 재미의 요소로 삼은 덕분에 매우 재미있었다. 적당한 긴장감과 갈등, 그리고 해소 덕분에 반나절만에 다 읽고 아쉬워했더라.
특히 좋았던 부분은, 여자들의 우정을 단순히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으로만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친구 사이는 당연히 순탄하기만 할 수 없다. 서로의 마음속 응어리진 갈등을 포장해 덮어두지 않았기에, 오히려 현실적이었고 몰입이 잘 되었다. 말 없는 납작한 조력자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끼리 부딪히는 편이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여러 어머니 역할의 인물들이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로 불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부분도 너무나 좋았다. 처음에는 외울 이름이 늘어나 조금 헷갈렸지만, 사실은 마땅히 외워야 했을 이름을 사회가 습관적으로 지워왔던 것임을 깨닫고 나자 늘어난 노고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두 가지 아쉬웠던 점은, 개과천선이 불가능한 인물처럼 보이던 사람이 나중에 가서 생각보다 쉽게 바뀌었다는 것과, 편견과 부모를 벗어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던 인물이 결혼의 형태를 선택했다는 부분이었다. 사랑의 형태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의지보다도 본인에 대한 사랑과 의지로서 더 멋진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삶을 먼저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은 어쨌거나 일종의 도피, 회피라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인물의 선택이 마냥 아쉬웠다. 그가 다른 선택을 할 세상, 그곳도 막걸리를 마시면 갈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세계일까?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 중 두 문장을 추리고 추려 기록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작은 용기가 모여서 큰일을 만드는 거지." 박병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작은 용기라고 할 수 없어요. 이런 말을 하는 데도 몇 번을 망설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용기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겠어요. 그냥, 똑같은 용기를 낸 거죠. 그 모든 사람들이." - 251p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여자 엄주영은 구원자가 되고 남자 엄주용은 망나니가 됩니다.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그 수많은 억압이 그런 결과를 낳았겠지요. - 32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