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서울국제도서전에 들렀을 때, SF 장르를 취급하는 출판사 부스에서 자유롭게 여러 권 고르다가 눈에 띄어 구매하게 되었던 책. 그때 10여권 정도를 사전 정보 없이 감과 추측만으로 구매했었는데, 이 책을 모르고 지나갔더라면 정말 아쉬웠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몰입력이 좋고 재미있는 책이다.
현대의 한국 SF는 대부분 좁고 깊은 과학 소재를 기반으로 하여 인문학적인 구조의 큰 주제를 키워나가는 경우가 많다. 미래의 시점에 어떤 기술이 발전했을 때 그 기술의 중심부 혹은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 구조가 어떤 식으로 바뀌는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지고 그 기술을 대해야 하는지,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그러나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는 철저히 과학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과학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자칫하면 지루하고 이해 가지 않는 학술적 사실만을 줄줄 나열해 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만들 수 있다. <별의 계승자> 또한 초반부에 그런 위기를 살짝 겪는데, 5만 년 전에 달에 있었던 '찰리'라는 존재가 밝혀지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된다. 이 책은 '찰리'가 발견되고, 우리가 믿고 있던 다윈의 진화론과 지구의 역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와중에 과학자들이 치열한 토론과 추리를 통해 모든 증거에 부합하는 완벽한 가설을 세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은 무대만 우주일 뿐이지 추리 소설의 형식과 거의 비슷하여, 수수께끼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기분이 든다. 아주 조그마한 힌트가 발견되고, 그 힌트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한 다음, 애가 탈 즈음에 다음 힌트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작가는 독자들을 충분히 즐겁게 한다.
과학자들의 토론이니만큼 쓰이는 용어나 오고 가는 말들이 어렵기는 하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나도 단번에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워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던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들(혹은 작가)의 기발한 발상을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다. 게다가 <별의 계승자>의 묘미는 끝에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설을 뒤엎고 보완하고 새롭게 보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장장 300페이지를 통해 짠 촘촘한 거미줄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되면, 머리 아픈 토론의 파도를 견딘 보람을 느낄 것이다.
<별의 계승자>는 인간이 우주 공간을 처음 발견하고 지구는 그 광활한 우주 속 티끌만 한 먼지보다도 작은 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을 다시 한번 선사한다. 이렇게 촘촘하고 치밀하게 짠 내용이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부분은 더 매력적이다. 타 SF 소설과는 다르게 과학 기술의 묘사에 더 집중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작가의 능력이리라. <별의 계승자>는 이 첫 권으로 명성을 얻은 뒤 4권을 추가로 집필해 현재 해당 세계관에는 총 5권이 연결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한 권이 주는 임팩트가 강렬하다 생각해 나머지 책들에는 오히려 관심이 안 가지만...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2권을 추가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