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우연히 구매하게 되었다. 그때 산 책이 대략 열 권쯤 되니, 이제 절반쯤 읽고 절반쯤 남은 셈이 되겠다. 여행을 가면 올해가 끝날 때까지 책을 읽을 여유가 안 날 테니, 아마 이 책이 나의 2022년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 짓기에 적당히 예측 불가능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의 향연이었다. 바로 전 리뷰에서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가 국제 도서전에서 만난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라 했는데, 전혜진 작가의 <아틀란티스 소녀> 또한 그에 비견한다고 말하고 싶다. 전자의 이야기는 탄탄한 세계관과 촘촘한 근거를 가진 느리고 긴 호흡의 장편이고, 후자의 이야기는 짧고 기발한 아이디어의 페이스트리가 겹겹이 쌓여 바스락거리는 가벼운 즐거움을 선물하는 단편 모음집이기에 성격이 매우 다르다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아틀란티스 소녀>는 짧은 흐름의 SF 단편 12작이 모인 소설집이다. 비슷한 소재가 여러 번 등장함에도 모든 이야기에서 각자의 색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재량 덕분이었으리라. 단순한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아닌, 충분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 이루어진 도약이기에 공학을 전공한 내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기계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작가의 넓고 깊은 지식 덕분에 이야기는 늘 현실적인 면모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미래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한 각도로만 보는 바람에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그것이 실제 삶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캐묻는 작가는 처음 본 것 같다. 마치 미래 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골목길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다가 벽에 그려진 아트를 보고 돋보기로 유심히 살펴보는 것 같달까.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우주 멀미와 함께 살아가는 법'과 '아틀란티스 소녀'이고, 생각지도 못한 소재와 전개에 신선함을 느꼈던 이야기는 '불법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과 '탯줄의 유예'이다. 상처 입은 이들 혹은 길을 잃은 이들에게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그 고요한 분위기를 사랑하게 되었고, 인간의 욕심과 치부를 날카롭게 꼬집는 냉철한 통찰력과 유머러스함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외에도, 정말 단순한 기술이나 소재일 뿐인데도 무한한 상상력과 응용력을 펼쳐 새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순수한 상상력이 주는 충격만으로는 정말 최고인 작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