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읽고 싶은 책을 미리 찾아서 가거나 추천받은 책을 고르는 편인데,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둘 다 아니었다.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빌리러 갔다가 전부 대출 중이길래 오래전에 읽어보고 싶다 기록만 해 두었던 이 책을 찾게 된 것이었다. 추천 이유는 함께 적어두지 않았기에 어떤 부분에서 끌린 책인지는 모른다. 다만 작가 소개란을 읽어보았을 때 '인도 출신의 SF 작가이자 이론물리학자'라는 문장에 눈길이 갔다. 인도 작가의 SF는 처음 읽어볼뿐더러 물리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보는 SF 세상은 어떨지가 궁금했다.
처음의 몇 단편을 연달아 읽고 나서는 지쳤다. 소재는 참신한데 이야기의 끝에 가서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변 소설이 현실의 문제들을 빗대어 표현한다 하지만, 그저 '표현'만 하는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기도 하고. 불쾌한 사실은 돌려 말해도 여전히 우울하고 불쾌하기 때문에, 현실의 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장르에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해결책을 그려내는 통쾌한 전개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단편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를 읽으며 위와 같은 이유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현실의 부조리를 잘 꼬집었으면서도 그에 관한 적극적인 해결은 등진 채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에 푹 빠져버렸다는 점이 닮았다.
다행히 단편 '보존법칙'부터는 이야기의 결이 조금 달라진다. 순수 환상문학에서 SF 장르로, 그리고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나아간 느낌이다. 그래서 절반 이후부터는 꽤 빠른 속도로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그중 '보존법칙'과 '은하수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성간 여행 시대의 신화들', 그리고 '사면체'가 무척 마음에 든다. 작가는 다중우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이를 '보존법칙'에서 흥미롭게 풀어냈다. 어쩌면 엉뚱하고 과하다고 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우주가 섞이는 순간의 상상과 묘사가 재미를 더해준다. '은하수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는 '신드바드의 모험'과 같은 환상적인 느낌의 짧은 글이었는데, 신화라는 틀 속에서 가볍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사면체'는 과학이나 기술보다도 억압받는 인도 여성의 내면에 집중했는데, 앞선 이야기들과 달리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시원했다.
작가가 물리 분야에서 전문가인 만큼 책에 쓰인 과학적 요소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만 해도 다중우주나 끈이론 등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익숙했던 거지, 이해하지 못하고 넘긴 부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단편 여러 개를 발견하고 나니 첫 절반을 읽고 책을 그대로 반납할까 고민하다 결국 끝까지 읽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여성 인권이 바닥인 인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 가부장제 사회 하의 여성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 또한 잘 나타나있다. 어떤 주인공들은 도피를 택하고 어떤 주인공들은 반항을 택한다. 과거에는 순응을 택했다 할지라도 이야기가 전개되며 변화를 택하는 인물들을 따라가면 재미있을 것이다. 읽기 어려운 책이라 누군가에게 선뜻 추천할 순 없지만,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