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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손

[도서] 에셔의 손

김백상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창작이란 것은 권태기가 오기 마련이다. 하루 종일 질리지 않고 즐길 수 있다 생각했더라도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 낸 작품에 성이 안 차게 되고 연이어 창작에 대한 의지가 스멀스멀 사그라든다. 그럴 때면 창작을 잠시 멈추고 다른 이들이 채워놓은 상상의 바다를 헤엄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흐려진 눈을 깨우는 번개같은 작품을 만난다. 작품의 완벽한 이모저모에 동화되어 잃어버렸던 창작에의 욕구와 열망을 다시금 맛보게 되면, 정체되어 있던 지점에서 한 발짝 나아가 한결 더 날카롭게 벼린 펜을 잡을 수 있다. 김백상 작가의 [에셔의 손]이 내게는 그런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읽기가 참 어려웠다. 문장이 수려해서 글로 나타내고자 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에 반해 전체적인 플롯에 대한 설명은 불친절했다. 누군가의 행위를 자세히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는 추측만 무성할 수밖에 없는, 작품과 내가 소리가 뭉개지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챕터가 이어지면서 작가의 탁월한 설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가 알 수 없었던 부분을 각기 다른 사람과 사건의 시선으로 조금씩 파헤쳐 나가며 점점 흥미를 돋운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진실에 대한 갈증이 해결되기 시작하면 작가가 촘촘하게 짜 놓은 세계 속에 푹 빠져들어 숨도 고르지 않고 달리게 된다. 그렇게 닿게 되는 마지막은 깔끔하고 완벽해서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담은 세계는 단순히 문장이 끝난다고 해서 닫히는 곳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글의 형태를 변형해 전뇌를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 나게 전달한 것도 좋았다. 전뇌(전자두뇌)를 생체 뇌에 연결하여 여러 일을 한 번에 병렬로 처리한다는 것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해도 문제가 없지만, 실제로 한 페이지에 여러 문단을 병렬로 배치해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한 것은 과감하지만 멋있다. 덕분에 미래 과학의 실체 - 우리가 상상해온 것들은 대부분 실제가 되어가고 있으니 - 를 더욱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에게는 색다른 시도고 독자에게는 색다른 경험이리라. 읽는 이에 따라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 '기억 삭제'나 '밀리건의 문' 알고리즘 등을 중간중간 도표와 그림으로 표현한 점도 기억에 남는다. 각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문장만으로는 온전히 상상해낼 수 없는 것들도 있는데, 그림을 덧붙여 사용하니 직관적이어서 좋았다(다행히 공학 논문의 악몽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에셔의 손]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전뇌를 사용하는 미래 세계와 신인류의 등장'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이야기는 그렇다 할 교훈을 내보이지는 않지만 신체에서부터 뇌까지 공학적으로 강화하는 미래의 사회관과 그 사이에서 새로이 등장한 별종들의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일련의 사건을 따라가며 주요 인물들을 관통하는 핵심 사건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건 한 편의 촘촘한 추리 영화 같다. 잘 짜인 가상의 세계는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문장이 생생한 장면을 그려내고, 장면을 통한 상상이 다시 문장 깊숙이 나를 이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엔 이 이야기가 나의 열망을 건드렸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또한 에셔의 손처럼,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고무하며 돌아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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