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트워크 파도 속을 탐험하다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적은 글들 중에서 기억할 만한 책들을 뽑아내곤 한다. 읽고 나서 너무 감명 깊어 누군가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 글. 그런 글은 공들여 쓴 열 마디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색다른 교훈을 얻었다. 누군가의 진심이 나와는 결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런 것. 그가 느낀 감정이 내게도 온전한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조금 더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그런 것을.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은 아픔으로 점철된 애절한 관계와 그들이 끝내 맞이한 비극에 대해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때로는 온 힘을 다해 소리치는 것보다 감정을 삭이며 나지막이 읊조리는 게 훨씬 깊은 내면에 와닿기에, 담백한 문장들이 갖는 힘은 강하다. 구와 담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감정의 널뛰기를 경험하지는 않지만, 빛보다는 어둠과 조금 더 가까운 서사인 것은 분명하다. 둘의 시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성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구와 담의 감정과 기억이 조금씩 다른데, 이를 통해 각자의 성격을 간접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어 즐거웠다.
특히 이야기의 초반부에 실린 구와 담의 어린 시절이 풍기는 풋풋한 내음이 참 좋았다. 왜, 어린 시절엔 친구들과 자주 엇갈리기도 하지 않았던가. 속마음을 숨기고 남들의 시선에 과하게 신경을 쓰고, 그럼에도 나의 세상은 나와 같이 작은 그 아이가 들어온 순간 꽉 차버렸기에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신경 쓰고 미워했던 적이, 아마 다들 어느 한순간쯤에는 있었을 것이다. 꼭 그것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돌아오는 것들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을 내어주었던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그런 촉촉한 어린 시절의 감상을 담백한 문장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어렴풋하게만 기억하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빛바랜 필름 카메라로 찍듯이 그려내는 글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도 - 물론 영상은 시각적인 자극 덕에 더욱 생생하지만 - 자주 볼 수 있고. 그렇기에 조금은 뻔하다고 생각해도 작가의 문장과 은유가 아름다워 쭉 읽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 기대는 힘없이 바스러졌다. 현실적인 것이 독이 되는 서사가 있고 득이 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구의 증명]은 전자였다. 구의 삶과 그의 현실도피적인 태도에서 나는 지나친 현실을 읽어냈고 이는 내가 느낀 불쾌감의 원인이었다.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 읽는 고전 문학 중 [운수 좋은 날]이나 [봄봄] 같은 것들. 우리가 살아가는 - 혹은 살아온 - 현실의 차별과 고정관념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기에 누군가에게는 명작이 되는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은은한 불쾌감을 주는 작품들. 부조리한 사회에서 안타까운 삶을 연명하며 발버둥 치는 모습에 연민의 시선을 보낼 때, 그런 동정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줌으로써 그들이 주변에 드리운 그늘에 대한 책망을 교묘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쉽게 간과해버린다. 구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 인물 중 하나였고, 그 때문에 나는 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참 어렵더라. 그래서 책을 덮고 나니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연민의 방향은 여전히 차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참 슬펐다.